
Paperis 아티클
흑사병 뒤에 임금은 정말 올랐나 — 어디서, 언제, 누구의 임금이었나
명목 품삯은 올랐고 실질임금은 먼저 떨어졌다. 죽은 사람 수도, 그 뒤에 자리 잡은 제도도 지역마다 달랐다.

Paperis 아티클
명목 품삯은 올랐고 실질임금은 먼저 떨어졌다. 죽은 사람 수도, 그 뒤에 자리 잡은 제도도 지역마다 달랐다.
이 글은 AI가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육·정보 제공용 콘텐츠이며, 전문가의 조언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셨나요? 알려주세요
© 2026 네오쿤스(Paperis) · 링크 공유는 환영합니다. 전문 전재·재배포는 사전 허가가 필요합니다.
1349년 6월, 잉글랜드에서 역병이 가장 사납게 돌던 그 여름에 에드워드 3세와 자문회의가 「노동자 조례」를 내놓았다. 일과 품삯과 물가에 관한 규칙 묶음이었고, 2년 뒤 「노동자 법령」으로 고쳐 다시 나왔다 (DOI: 10.1093/pastj/gtq032). 조례가 걱정한 것은 명시적이었다. 「이번 역병으로 지금 죽어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일꾼과 하인들」 때문에 추수가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그 뒤가 더 놀랍다. 1351년부터 1430년 사이에 열린 의회 77개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수가 노동 관련 법을 통과시켰고, 1440년대 중반과 1490년대에도 다시 법이 나왔다 (DOI: 10.1017/9781846151385.006).
목표는 셋이었다고 그 연구는 적는다. 품삯이 그때그때 용인되는 수준 위로 오르는 것을 막을 것, 일꾼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옮겨 다니는 것을 막을 것, 그리고 고용주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강제할 것.
이 법은 오래 살아남았다. 1563년 「장인 법령」에 흡수되었고, 18세기까지도 적어도 일부가 시행되었으며, 법전에서 지워진 것은 격론 끝에 1814년이었다 (DOI: 10.1093/pastj/gtq032).
그러니 이 법령들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말해 준다. 노동을 규율하는 법을 80년 동안 스물여섯 번 이상 만들었고 그 첫 번째 목표가 품삯 억제였다면, 누르지 않으면 오르는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법은 오랫동안 그렇게 읽혀 왔다.
그런데 법령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얼마나 올랐는지, 어디서 올랐는지, 언제 올랐는지, 누구의 임금이 올랐는지를.
이 글은 그 네 칸을 채우려는 시도다. 그리고 채우려고 보면 교과서 문장 하나가 먼저 걸린다. 인구가 줄어 일손이 귀해졌고, 그래서 임금이 올랐고, 그래서 서유럽의 예속이 풀렸다는 문장이다.
읽기 전에 한 가지만 정해 두자. 이 글에서 가장 조심할 것은 논리와 관측을 구분하는 일이다. 「사람이 줄면 일손이 귀해져 품삯이 오른다」는 추론은 그럴듯하다. 너무 그럴듯해서, 누가 실제로 재 본 문장인 것처럼 읽히기 쉽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문장마다 어디서·언제·무엇을 재서 얼마나 올랐는지를 붙인다. 그것이 붙지 않은 문장은 잰 것이 아니라 따져 본 것이다.
14세기 전반 잉글랜드에는 400만에서 600만 사이의 사람이 살았다. 250년쯤 전보다 적어도 세 배, 어쩌면 네 배였다 (DOI: 10.1017/cbo9780511560811.003).
이 숫자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20세기 중반 영국 중세사의 중심에 있었다. 사람이 그만큼 늘자 곡물 경작에 지나치게 몰렸고, 농법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지력이 고갈되고 경작지가 버려졌으며, 농업 생산이 실제로 줄었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의 잇단 흉작이 그것을 악화시켰고, 그중 최악이 1315~17년의 대기근이었다. 인구는 거기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그림에 따르면, 1348~9년에 페스트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때린 것은 이미 줄어들고 있던 인구였다 (DOI: 10.1017/cbo9780511560811.003).
이 그림에는 사람 이름이 붙어 있다. M. M. 포스탠이다.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추론에도 이름이 있다. 맬서스 논리는 먹여 살릴 땅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늘면 한 사람 몫이 줄고, 사람이 줄면 한 사람 몫이 늘어난다는 추론이다. 논밭 넓이가 고정된 마을에 식구가 두 배로 늘면 한 그릇씩 덜 먹게 되고 일손은 흔해지니 품삯이 싸진다 — 이 화살표를 거꾸로 돌린 것이 흑사병 이야기다.
1985년에 나온 한 연구는 이 그림의 위상을 이렇게 적는다. 포스탠의 신맬서스주의적 설명은 아주 많은 중세 경제사·사회사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것을 겨눈 진지한 도전은 그가 든 증거가 정황적이라는 쪽보다 인구 추세에 제1원인의 지위를 준 쪽을 향했다 (DOI: 10.1017/cbo9780511560811.003).
이제 임금 부분이다. 그러려면 값을 하나 정해 두어야 한다. 받은 돈의 액수 자체를 명목임금이라 하고, 그 돈으로 실제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을 실질임금이라 한다. 품삯이 두 배가 되어도 빵값이 세 배가 되었으면 실질임금은 떨어진 것이라, 이 값을 내려면 임금 장부만이 아니라 그 시절 물가표가 함께 있어야 한다.
포스탠 명제의 임금 부분은 이렇게 정리된다. 잉글랜드에서 1450년경까지 인구가 약 50% 줄면서 땅과 일손의 비율이 크게 달라졌고, 그래서 실질임금이 올랐다. 두 갈래로 오른다 — 일손 하나가 더 귀해지고, 동시에 먹을거리 값이 떨어진다. 그리고 포스탠은 화폐 쪽 요인이 값과 임금을 정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봤다 (DOI: 10.1484/m.tmc.5.103787).
여기까지가 모형이다. 그리고 모형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좋은 모형은 검사할 수 있는 예측을 만들고, 이 모형도 만든다. 예측 하나는 값의 갈라짐이다. 인구가 줄어 곡물 수요가 줄면 곡물 값만 떨어지고, 대부분의 가축 산물과 특히 공산품 값은 오른다 — 즉 물건 종류에 따라 값이 벌어져야 한다 (DOI: 10.1484/m.tmc.5.103787). 이 예측은 뒤에서 검사된다.
당시 설명이 이것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1985년에 나온 다른 정리는 여러 갈래를 나란히 적는다. 생산요소들이 서로 어긋난 데서 온 위기라는 읽기, 1935년에 이미 제시된 「인구 붕괴에 이어 곡물값이 낮은 농업 불황이 왔다」는 읽기 — 이 쪽이 그 뒤 지배적 정설이 되었고 로버트 브레너가 그 최신 비판자라고 이 글은 적는다 — 그리고 위기가 사회경제 체제 전체의 위기였다는 마르크스주의 쪽 읽기가 함께 있었다 (DOI: 10.1017/cbo9780511562358.009).
맬서스 논리는 지금도 형식 모형으로 쓰인다. 1350년부터 1700년까지 유럽의 1인당 소득과 도시화율이 오른 것을 설명하려고 두 부문 모형을 세운 연구는 흑사병을 인구 충격으로 넣고 그 충격이 임금을 크게 올렸다고 적는데, 저자들이 하는 일은 자료에서 그것을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모형을 실제 값에 맞춰 보이는 것이다 (DOI: 10.1093/restud/rds034, 모형·보정 연구).
그러니 우리가 검사할 문장은 이것이다. 잉글랜드에서 1348년 이후 실질임금이 올랐고, 그 원인은 인구 감소다.
1320년대 잉글랜드의 어느 농지에서 지붕 이는 사람에게 하루 얼마를 주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700년 전인데도 그 장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검사하려면 자가 필요하고, 이 이야기의 자는 대부분 그 장부에서 나왔다.
장원 회계는 중세 잉글랜드의 큰 농지 관리인이 해마다 적어 올린 수입·지출 장부이고, 누구에게 하루에 얼마를 주었는지가 거기 적혀 있다. 밀 몇 부셸, 소 몇 마리, 지붕 이는 사람 며칠치 품삯이 항목별로 적힌 두루마리라, 오늘날 임금 계열의 상당 부분이 이 두루마리를 세어 만든 것이다.
이 두루마리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예가 있다. 기록이 가장 잘 남은 잉글랜드 장원 60여 곳의 회계를 분석한 2013년 연구는, 1320년대와 1330년대 초에 가뭄이 잉글랜드 기후의 흔한 특징이 되었다는 것을 보였다. 가뭄은 파괴적인 흉작을 불렀고 여러 질병의 심한 유행을 일으켜 사망이 급증하고 인구가 줄었다 (DOI: 10.1111/1468-0289.12035).
그런데 이 연구가 붙인 한정어가 결과만큼 중요하다. 그런 일이 벌어진 곳은 「주로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의 여러 주에 국한」되었고, 저자는 이런 지역 편차가 이 시기의 인구·농업·재정 추세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적는다 (DOI: 10.1111/1468-0289.12035).
장부가 남은 곳이 곧 그 일이 벌어진 곳은 아니고, 그 일이 벌어진 곳이 곧 잉글랜드 전체도 아니다. 이 두 문장이 이 글 전체에 걸린다.
자 자체를 검사한 연구들도 있다. 세 가지가 걸린다.
첫째, 하루 품삯은 한 해 소득이 아니다. 2019년에 나온 연구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적는다. 옛 노동자의 연 소득 추정치는 하루치 임률에서 거꾸로 계산해 낸 것인데, 그 노동자가 한 해에 며칠을 일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날품 대신 한 해 단위로 고용된 사람에게 지급된 금액으로 계열을 새로 만들었다. 1260년부터 1850년까지 잉글랜드다.
저자들의 자료는 이렇게 본다 — 하루 임률로 만든 기존 추정은 중세 노동소득을 과대평가하고, 산업혁명기 노동소득은 과소평가한다 (DOI: 10.1093/ej/uez017).
과대평가. 이 한 단어가 「흑사병 뒤 황금기」의 크기를 직접 건드린다.
둘째, 물가 바구니가 답을 바꾼다. 실질임금을 내려면 임금을 물가로 나눠야 하는데, 그 물가를 무엇으로 잡느냐가 결과를 뒤흔든다.
2020년 스페인 연구는 바구니에서 곡물 가격을 갈색 빵 가격으로 바꿔 넣었다. 그러자 북서 유럽과 스페인 사이 격차의 크기와 시점이 통째로 달라졌고,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미숙련 최저 생계 임금이 표준 모형의 계산보다 유의하게 낮게 나왔다. 저자들은 이것이 「고임금 가설」을 누그러뜨린다고 적는다. 이 연구가 다룬 기간은 1500년부터 1800년까지다 (DOI: 10.1093/ereh/heaa005).
같은 성질을 반대쪽에서 보인 연구도 있다. 폴란드 실질임금을 유럽 비교틀에 넣은 2016년 연구는, 임금을 나눌 바구니에 맥주와 빵처럼 더 가공된 곡물이 많이 들어갈수록 폴란드 도시들에 대한 런던의 우위가 커진다는 것을 보였다. 이 연구의 기간도 1500년부터 1800년까지다 (DOI: 10.1093/ereh/hew004).
셋째, 도시 한 곳이 나라를 대표하지 않고 임금 노동자가 주민을 대표하지 않는다. 시칠리아 왕국의 실질임금을 1540년부터 1850년까지 재구성한 2024년 연구는 지역마다 추세가 제각각이라며, 도시 한 곳 분석의 편향을 피하려면 공간적으로 더 넓게 훑어야 한다고 적는다 (DOI: 10.1111/ehr.13359).
그리고 16세기 스헤르토헨보스를 1500년부터 1560년까지 본 2009년 연구는, 실질임금이 강하게 떨어지는 동안 주민 다수의 형편은 그렇게 읽히지 않았고 임금 노동자의 소득 경험이 「놀라울 만큼 비전형적」이었다고 보고한다 (DOI: 10.1017/s1361491609990086).
이 다섯 연구는 흑사병 시기를 잰 것이 아니다. 네 편은 1500년 이후를 다루고, 한 편은 1260년부터를 다루지만 초점이 산업혁명까지 걸쳐 있다. 이들이 검사한 것은 그 시절이 아니라 자 자체다. 그런데 자가 흔들리면 그 자로 잰 값이 함께 흔들린다.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의 임금·물가 자료를 함께 놓고 1300년부터 1500년까지를 따라간 연구가 있다. 그 연구가 적은 순서는 교과서와 다르다.
1348년 뒤에 명목 품삯은 실제로 올랐다. 두 나라 모두 그랬다. 그런데 생활비도 함께 올랐다. 잉글랜드에서는 1370년대 후반까지, 플랑드르에서는 1380년대 후반까지 물가가 사납게 올랐다. 그 뒤에 소비자 물가가 가파르게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화폐 임금이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 플랑드르에서는 물가만큼 내려가지는 않았다 (DOI: 10.1016/s0363-3268(0321007-7).
그래서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두 나라에서 관측된 뚜렷한 실질임금 상승의 주된 설명은, 이 연구에 따르면 제도적인 임금 경직성과 물가 하락의 조합이었다 (DOI: 10.1016/s0363-3268(0321007-7).
임금 경직성이란 한번 올라간 품삯이 물가가 내려가도 따라 내려가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물가가 3할 떨어지는 동안 품삯이 그대로면, 아무도 임금을 올려 주지 않았는데도 실질임금은 3할 넘게 오른다. 노동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계약이 굳어 있었던 것이다.
같은 저자가 2015년에 포스탠 명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글에서 같은 순서를 다시 적는다. 흑사병 직후에 실질임금은 가파르게 떨어졌고, 그다음 14세기 후반부터 가파르게 올랐다. 그 상승은 물가가 몇십 년에 걸쳐 내려가는 국면에서 화폐 임금이 아래로 잘 움직이지 않아 생긴 결과였고, 특히 금은이 모자라던 두 시기 — 1370년경부터 1415년경까지, 그리고 1440년부터 1475년까지 — 에 그랬다 (DOI: 10.1484/m.tmc.5.103787).
그리고 이 글은 앞 절에서 말한 예측을 검사한다.
값은 갈라졌는가. 포스탠은 곡물 값만 떨어지고 공산품 값은 오르리라고 봤다. 이 글이 만든 표는 물가가 오르는 국면에서도 내려가는 국면에서도 농산물 값과 공산품 값이 함께 오르고 함께 내렸다고 보인다 — 꼭 같은 폭은 아니었지만 방향이 같았다 (DOI: 10.1484/m.tmc.5.103787).
두 번째 검사는 비교다. 잉글랜드는 기본적으로 농촌 농업 경제이고 플랑드르는 훨씬 상업화·공업화·도시화된 경제다. 그렇게 성격이 다른 두 경제가 물가와 임금에서 같은 추세를 겪었다면, 농업에 기반한 모형만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논증이다 (DOI: 10.1484/m.tmc.5.103787).
여기서 저자가 자기 결론의 크기를 스스로 줄여 놓은 대목을 빼면 안 된다. 글의 핵심 주제를 「화폐가 중요하다」로 적으면서 그는 곧바로 덧붙인다. 그렇다고 화폐 요인이 모든 경제 현상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건들 사이의 상대 가격 차이는 실물 요인으로도 설명된다고 그는 적는다 (DOI: 10.1484/m.tmc.5.103787). 인구 요인이 아무 역할도 안 했다는 주장이 아니라, 인구 요인만으로 정해졌다는 강한 형태를 겨눈 것이다.
이 절에서 남길 것은 결론이 아니라 순서다.
모형이 말하는 순서는 이렇다. 인구가 줄었다 → 일손이 귀해졌다 → 실질임금이 올랐다.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에서 관측된 순서는 이렇다. 명목 품삯이 올랐다 → 물가가 더 올라 실질임금이 먼저 떨어졌다 → 서른 해쯤 뒤(잉글랜드)에서 마흔 해쯤 뒤(플랑드르)에 물가가 꺾였다 → 품삯은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 실질임금이 올랐다.
두 이야기는 같은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도착 시점이 한 세대에서 한 세대 반 차이 나고, 마지막 한 걸음을 밀어 준 것이 서로 다르다. 「올랐다」만 말하면 이 차이가 통째로 사라진다.
호수와 습지 바닥에서 원통으로 뽑아 올린 진흙 기둥에는 층마다 그 시절의 꽃가루가 갇혀 있다. 흑사병이 얼마나 죽였는가를 다시 물은 자료가 거기서 나왔다.
앞의 모형에는 입력값이 하나 있다. 인구가 얼마나 줄었는가다. 그 값도 지금은 논쟁 중이다.
팔레오생태 자료는 호수와 습지 바닥에 해마다 가라앉아 쌓인 꽃가루를 층층이 꺼내 어느 시절에 어떤 식물이 그 둘레에 있었는지를 읽어 낸 것이다. 밀 꽃가루가 줄고 잡초와 나무 꽃가루가 늘었다면 그 땅을 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라, 사람 수를 세는 대신 사람이 하던 일이 멈췄는지를 본다.
2022년에 나온 연구가 이 꽃가루를 유럽 규모로 모았다. 오늘날 유럽 19개국에 걸친 호수·습지 261곳에서 방사성탄소 연대가 붙은 시추 자료를 모아, 역사적 지역 21곳에 대해 두 가지 독립적인 방법으로 물었다. 흑사병 무렵 경관에 나타난 변화가 「몇 해 안에 인구의 상당 부분, 절반 이상이 죽었다」는 가설과 맞는가 (PMID 35145268).
답은 지역마다 달랐다. 어떤 지역에서는 흑사병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영향이 미미하거나 없었다 (PMID 35145268).
저자들이 그 앞에 적어 둔 문장이 이 결과의 뜻을 정한다. 흑사병에 대한 지식이 「주로 서유럽 일부 지역에 대해 남아 있는 중세 문헌의 정성적 서술에 기반」해 왔다는 것이다 (PMID 35145268). 유럽 절반이라는 숫자는 유럽 전역을 세어 얻은 값이 아니라, 자료가 남은 곳에서 얻은 값을 유럽 전체로 넓힌 것이었다.
그렇다고 「덜 죽었다」로 읽으면 안 된다. 같은 초록이 어떤 지역에서는 파괴적이었음을 확인한다고 적고, 지역 간 차이의 원인으로 문화·생태·경제·사회·기후 요인을 든다 (PMID 35145268). 그리고 2025년에 나온 케임브리지 연구는 배경 문장에서 흑사병이 잉글랜드 인구의 약 절반을 죽였다고 그대로 쓴다 (PMID 41023128). 흔들린 것은 사망 규모 자체가 아니라 그 규모를 유럽 전역에 균일하게 적는 습관이다.
이것이 왜 임금 이야기인가. 「인구가 절반 줄었으니 일손이 귀해졌다」로 시작하는 문장은 어느 지역의 절반인지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거의 줄지 않은 지역에서는 그 문장의 첫 칸이 비어 있고, 첫 칸이 비면 뒤 칸도 채울 수 없다.
1654년 보헤미아에서 자료가 남은 마을이 6,983곳이다. 그 마을들의 직업 구성을 분석한 2015년 연구는, 농업이 아닌 활동의 비중이 서유럽보다 낮았다는 것을 보였다 (DOI: 10.1111/ehr.12118).
이 글에서 가장 큰 뒤집기는 여기 있다. 서유럽에서 예속이 풀렸다는 그 시기에, 유럽의 다른 쪽에서는 반대 방향의 제도가 자리 잡았다.
먼저 서쪽 팔부터 등급을 정해 두자. 「서유럽에서 예속이 풀렸다」는 이 글이 읽은 문헌 안에서 실측 계열로 나오지 않는다. 나오는 것은 종설 한 편이고, 그 종설은 서유럽 농노제의 소멸을 흑사병의 장기 효과 목록에 넣으면서 「연관된다」고 적는다 (DOI: 10.1257/jel.20201639, 종설).
제2차 농노제는 서유럽에서 농민을 땅에 묶어 두던 제도가 느슨해지던 무렵에 오히려 엘베강 동쪽에서 그 구속이 더 촘촘해진 흐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같은 시기 유럽 지도 위에서 서쪽과 동쪽의 화살표가 반대로 그려진다는 뜻인데, 그 화살표가 언제부터였고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이름이 붙은 뒤에도 계속 논쟁거리다.
그 보헤미아 자료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관계의 모양이다. 영주가 마을 보유지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로 제2차 농노제의 강도를 재 보면, 농업이 아닌 활동과의 관계는 단조로운 반비례가 아니라 굽은 곡선이었다. 저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 영주들은 자기가 지대를 뽑아낼 수 있는 활동은 장려하고, 장원의 이익을 위협하는 활동은 억눌렀다 (DOI: 10.1111/ehr.12118).
임금 쪽 계열도 있다. 폴란드 실질임금을 유럽 비교틀에 넣은 연구는 1500년에 이미 잉글랜드가 폴란드보다 부유했고, 두 나라가 1600년경 수렴했다가, 17세기부터 폴란드가 뒤처지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같은 연구는 그 비교틀 안에서 폴란드가 도시 부문과 농촌 부문 사이 소득 격차가 가장 큰 나라였다는 것도 보인다 (DOI: 10.1093/ereh/hew004).
수리력을 지표로 삼은 워킹페이퍼 한 편은 폴란드가 17세기 초에 꽤 높은 수준이었다가 그 뒤 남유럽보다도 아래로 떨어졌다고 보고한다. 저자들의 표현은 조심스럽다. 이것이 「17세기에 탄력을 받은 제2차 농노제가 동유럽의 인적 자본 축적을 늦춘 핵심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논문은 그 지역의 큰 전쟁들도 수리력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인다 (DOI: 10.4054/mpidr-wp-2014-008, 워킹페이퍼).
여기서 멈춰야 한다. 지금까지의 자료가 실제로 보인 것은 대비의 동쪽 팔이지 사슬이 아니다. 보헤미아 자료는 1654년이고, 폴란드 임금 계열은 1500년부터 1800년까지이며, 수리력은 17세기 이후다. 흑사병이 지나간 것은 1340년대다.
「흑사병이라는 같은 충격이 서쪽에서는 예속을 풀고 동쪽에서는 조였다」는 문장은, 이 글이 읽은 문헌 안에서 누가 재서 보인 문장이 아니다. 동쪽 자료는 실측되었고, 서유럽의 예속 해체는 종설이 「연관된다」로 적은 항목이며, 1348년까지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은 아직 가설이다.
그리고 그 대비를 설명하는 방식들이 문헌 안에서 흔들린다.
첫째, 동쪽과 서쪽이 갈린 이유를 다룬 2013년 글은 자기가 내놓는 것이 가설이라고 명시한다. 엘베강 동쪽 농민들이 공동 자원을 함께 관리하는 제도를 요구할 힘이 없었고 그것이 제2차 농노제의 구속과 함께 갔다는 그림인데, 저자들 스스로 「우리의 가설」이라 적고 「설명 틀 몇 가지를 제안한다」로 닫는다 (DOI: 10.18352/ijc.355, 가설 제시).
둘째, 동서 독일을 비교한 브레너의 서술은 1985년에 정면으로 반박당했다. 엘베강 동쪽 농민 공동체가 늦게 생긴 식민 정착지라 공동체 전통이 없었고 그래서 근세에 농노로 떨어졌다는 브레너의 논거에 대해, 이 반박은 그가 「호엔촐레른 전설」이라 불리는 프로이센 신화에 빠졌고 근대 독일사의 명암을 중세로 소급 투영했다고 적는다 (DOI: 10.1017/cbo9780511562358.006).
그리고 대비의 구도 자체를 겨누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제2차 농노제가 하나의 균질한 결과를 낳았다는 그림이다. 18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규모 가구 자료를 분석한 두 연구는, 제2차 농노제가 가족 구조에 미친 영향이 결코 균일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강제적인 노동 통제 형태와 복합 가구 구조 사이에 기능적 연결을 상정하는 통설은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적는다 (DOI: 10.1017/s0268416008006929; DOI: 10.1016/j.hisfam.2008.05.003).
다른 하나가 더 날카롭다. 「자유로운 서쪽 대 예속된 동쪽」이라는 구도 자체를 겨누는 연구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러시아의 노동 법적 지위를 다룬 2009년 연구는,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적이 없다고 논증하면서 차르 시대의 규정을 영국과 그 제국의 「주인과 하인 법」 및 계약 노동, 그리고 프랑스의 노동 규정과 비교한다.
결론은 이렇다 — 그런 노동 계약과 제도는 「자유 노동」의 반대편이 아니었고, 「자유 노동」 쪽 제도도 보통 인정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구속을 노동자에게 두었다 (DOI: 10.1017/s0020859009990307).
그 「주인과 하인 법」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법이 이 글의 첫 절에 나왔다. 1349년 노동자 조례에서 시작해 1563년 장인 법령으로 흡수되고 18세기까지 살아남은 계열인데, 한 연구는 이 계열이 결국 대영제국 전역의 고용법을 빚었고 「어떤 추정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4분의 1가량에 닿았다고 적는다 (DOI: 10.1093/pastj/gtq032).
즉 서유럽에서 예속이 풀렸다고 말할 때, 같은 시점에 노동을 붙잡아 두려고 만들어진 것이 있었고 그것은 500년 가까이 법전에 남아 있었다.
1260년부터 1850년까지 잉글랜드 미숙련 여성 노동자의 임금 계열을 두 개 만든 연구가 있다. 하나는 하루 품삯이고, 다른 하나는 한 해 단위 계약에 담긴 하루치 보수다.
두 계열을 서로 견주고 또 남성 자료와 견준 결과, 저자들은 이렇게 적는다. 여성 하인은 흑사병 뒤의 「황금기」를 함께 누리지 않았고, 그래서 여성이 이끈 경제적 도약이라는 그림에는 근거를 거의 주지 않는다 (DOI: 10.1017/s0022050715000662). 작은따옴표는 저자들의 것이다. 「황금기」라는 말 자체가 그 논문에서 인용부호 안에 들어 있다.
법의 시행도 균일하지 않았다. 1349년 조례와 1351년 법령의 시행 기록을 체셔에서 1349년부터 1374년까지 뒤진 2013년 연구는, 이 주에 치안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시행 방식이 「잉글랜드의 다른 곳과 상당히 다르게」 굴러갔다고 보고한다. 이 주는 당시 흑태자가 체스터 백작으로 다스리던 곳이라 행정과 기록 자체가 달랐다 (DOI: 10.3828/archives.2013.6).
시행이 가장 강했던 것은 초기 10년이다. 1349년 6월 조례는 의회를 열 수 없다고 여겨지던 때에 자문회의가 낸 것이었고, 1351년 2월에 의회가 열렸을 때 상당한 수정을 거쳐 법령으로 다시 나왔다. 그 뒤 10년 동안 실제로 강한 시행 노력이 있었다고 그 연구는 적는다 (DOI: 10.1017/9781846151385.006).
그러니 「흑사병 뒤에 임금이 올랐다」는 문장에는 네 번째 빈칸이 있다. 누구의 임금인가. 남성인가 여성인가, 날품인가 한 해 계약인가, 그리고 그가 사는 주에 치안판사가 있었는가.
런던의 옛 묘지 몇 곳에서 파낸 사람 뼈가 있다. 11~12세기 339명과 13세기 258명이다 (PMID 26174498). 여기서부터는 종이가 아니라 이 뼈에서 읽은 자료다.
이름을 하나 정해 두자. 골격 스트레스 지표는 굶주림이나 감염처럼 몸에 무리가 갔던 일이 뼈와 이에 남긴 흔적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고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는 것만 알려 주는, 이름 없는 영수증 같은 것이다. 이 흔적을 어떻게 읽는지는 같은 시리즈에서 농경 전환기의 건강을 다룬 편이 자세히 다뤘다. 아래에서 볼 영양 부족의 흔적과 이에 남은 자국이 그런 골격 스트레스 지표다.
그 런던 표본에서 나온 결과는 이렇다. 나이대별 사망 분포가 두 시기 사이에 유의하게 달랐고 13세기 쪽에 나이 든 성인이 더 적었으며, 생존 분석 결과 13세기의 생존율이 유의하게 낮았다 (PMID 26174498).
저자들의 결론은 이렇다. 13세기에 전반적으로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고, 그것이 흑사병 때의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을 수 있다 (PMID 26174498).
같은 방향을 다른 자료로 보인 연구도 있다. 고고학 소견과 장원 회계의 동시대 수량 자료를 함께 놓은 2013년 연구는, 흑사병이 오기 전 잉글랜드 사람 대부분이 단백질·칼슘·비타민 B12의 만성적 부족을 겪었고 그 기간이 적어도 한 세대였다고 적는다. 보통 대기근에 돌려지는 1315~17년 세 해의 흉작보다 훨씬 긴 기간이다.
저자들은 1319~20년의 대규모 소 역병이 유제품을 오래 끊어 놓아, 대기근을 견뎌 낸 세대보다 덜 건강한 세대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DOI: 10.1162/jinh_a_00500).
키 계열도 있다. 잉글랜드에서 나온 넙다리뼈로 지난 2천 년의 키를 추정한 연구는 1200년 이후 키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농업 불황·대기근·흑사병과 시기가 겹친다고 보고한다. 그다음에 키는 회복해 거의 300년 동안 유지되는 고원에 이르렀다. 같은 연구는 14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보고된 평균 키가 20세기의 키와 비슷했다고 적는다 (DOI: 10.1108/s0363-326820180000034003).
그러니 1348년은 건강한 인구를 때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앞의 임금 계열에 곧바로 걸린다. 흑사병 뒤의 값을 무엇과 견줄 것인가. 13세기 말의 잉글랜드와 견주는 것과 12세기의 잉글랜드와 견주는 것은 다른 답을 낸다.
흑사병 뒤에 사람들의 몸이 실제로 나아졌는가. 여기서 자료가 갈린다.
런던의 흑사병 이전 묘지들과 이후 묘지 한 곳을 견준 연구가 있다. 이전 표본은 길드홀 야드 75명, 세인트 니컬러스 섐블스 246명, 그리고 1120년부터 1300년까지의 세인트 메리 스피털 143명이다. 이후 표본은 1350년부터 1538년까지 쓰인 세인트 메리 그레이스 묘지 133명이다.
출생률 변화를 통제하고 견준 결과 두 시기 사이에 생존과 사망 위험에 유의한 차이가 있었고 출생률에는 없었다. 저자들은 이것이 흑사병 뒤 건강이 나아졌음을 시사한다고 적는다 — 그 뒤로도 페스트가 되풀이해 돌았는데도 그랬다 (PMID 24806459).
같은 방향의 최근 결과도 있다. 런던과 링컨셔 농촌에서 나온 275명의 뼈와 이를 서기 1000년경부터 1540년경까지 훑은 2025년 연구는, 영양 스트레스의 유병률이 흑사병 이전에 올라갔다가 이후에 내려갔다고 보고한다 (PMID 40737406).
그런데 같은 종류의 자료가 다른 도시에서 다른 결과를 냈다.
2025년에 나온 케임브리지 연구는 서기 940년부터 1561년까지의 성인 336명에 대해 골격·분자 지표 18가지를 봤다. 결론은 두 가지다.
첫째, 이 유행병이 수백만 명을 죽였는데도 건강과 생활방식의 골격 지표에는 이 유행병 탓으로 직접 돌릴 만한 극적인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지표는 그대로였거나, 이미 알려진 다른 역사적 추세를 따라 움직였다. 둘째, 흑사병 이전부터 시작된 장기 추세가 있었고 그중 두드러진 것이 키의 감소였다 (PMID 41023128).
저자들의 문장은 이렇다. 페스트는 참혹했지만 중세인의 건강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PMID 41023128).
그리고 이 갈림 위에 문제가 하나 더 얹힌다.
선택적 사망은 어떤 재난이 사람을 무작위로 데려가지 않고 특정한 조건을 가진 쪽을 더 많이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 재난이 지나간 뒤에 남은 사람들은 이전 인구를 대표하지 않게 되므로, 뒤에 잰 값이 나아진 것인지 재는 대상이 바뀐 것인지를 따로 갈라내야 한다.
흑사병은 무차별했는가. 오랫동안 그렇다고 여겨졌다. 병이 워낙 사납고 당시 유럽 인구가 면역학적으로 무방비였으니 나이도 성별도 건강 상태도 가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이었고, 그 가정이 맞다면 흑사병 묘지는 14세기 유럽 인구의 편향 없는 단면이 된다.
2008년 연구가 그 가정을 검사했다.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의 흑사병 묘지에서 나온 뼈를 덴마크 두 도시인 비보르와 오덴세의 평상시 묘지 표본과 견준 결과, 흑사병은 무차별하게 죽이지 않았다. 이미 몸이 약했던 쪽을 더 많이 데려갔다. 다만 저자들이 붙인 한정어를 함께 옮겨야 한다. 그 선택성은 평상시 사망만큼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MID 18227518).
같은 질문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본 연구도 있다. 런던 묘지 자료에 결측치 처리를 새로 적용한 2025년 연구는 기근과 페스트 모두에서 남성과 이전에 스트레스를 겪은 사람의 사망 위험이 높았고, 페스트에서는 나이 든 성인의 위험도 높았으며(기근에서는 아니었다), 단백질이 풍부한 식사가 두 경우 모두에서 보호적이었다고 보고한다 (PMID 40715520).
헤리퍼드 대성당의 흑사병 집단 매장지 73명과 같은 자리 교구 묘지 104명을 견준 2023년 연구는, 집단 매장지에서 15~24세 젊은 성인이 크게 과대 대표되었고 사망이 25~34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고 보고한다. 어릴 때 크게 앓은 흔적이 이에 남은 사람은 집단 매장지 쪽에 더 많았다. 다만 같은 연구에서 다른 두 스트레스 지표는 집단 매장지 쪽에 오히려 덜 나타났고, 저자들은 이것을 지표마다 페스트 취약성과의 연결 강도가 다를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고 적는다 (PMID 37650443).
그래서 앞의 두 갈래가 하나로 묶인다. 흑사병 뒤 런던의 뼈에서 읽힌 건강 개선 가운데 얼마가 살림이 나아진 몫이고 얼마가 약한 사람들이 먼저 죽어 남은 표본이 달라진 몫인지는, 아직 갈라내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명제를 가장 강한 형태로 밀어붙인 것이 유전학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논문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2022년 논문은 흑사병 이전과 도중과 이후의 유럽 두 집단에서 나온 고대 유전물질 206점을 대상으로 면역 관련 유전자 주변을 읽었다. 면역 유전자 자리들이 그렇지 않은 자리들에 비해 집단 간 차이가 큰 지점으로 뚜렷하게 몰려 있었고, 저자들은 이것이 양성 선택을 시사한다고 적었다.
런던 자료에서 차이가 큰 변이 245개를 찾았고 그중 넷이 덴마크의 독립 표본에서 재현되었다. 그중 하나는 세포 실험에서 페스트균에 대한 반응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 보호적 변이들이 오늘날 자가면역 질환 감수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진 변이들과 겹친다고 덧붙였다 (PMID 36261521).
2023년에 나온 반박은 네 가지를 짚는다. 첫째, 흑사병 전후 런던 자료에서 면역 유전자에 큰 변화가 몰려 있다는 신호는 적절한 무작위화 검정을 적용하면 사라진다. 유의확률이 10자릿수만큼 커지면서 더 이상 유의하지 않게 된다.
둘째, 유전자 빈도 추정에 기술적 오류가 있어서 원래 보고된 네 자리 가운데 실제로 걸러내기 기준을 통과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셋째, 그 기준이 여러 번 검정한 것을 충분히 보정하지 못한다. 넷째, 앞서 페스트균 반응과 연결된 그 변이에서 유의한 빈도 변화가 원 논문 자료에서도, 2천 년에 걸친 공개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PMID 36993413).
반박 논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흑사병 동안 면역 유전자가 자연선택을 받았을 가능성은 여전히 그럴듯하지만, 그 선택의 크기와 어떤 유전자가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PMID 36993413).
여기서 어느 쪽 손도 들지 않는다. 이 두 편을 넣은 이유는 답 때문이 아니라 자리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달랐다」는 문장은 흑사병 뒤의 모든 계열 밑에 깔려 있고, 그 문장이 정확히 얼마나 참인지가 지금 논쟁 중이다.
2022년에 나온 한 종설은 흑사병의 경제적 영향에 관한 문헌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페스트의 초기 효과는 대단히 파괴적이었다. 임금과 1인당 소득은 올랐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 상승이 유지된 것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뿐이었다 (DOI: 10.1257/jel.20201639, 종설).
마지막 문장이 이 글의 요점이다. 그리고 그 「일부」가 어디였는지를 잰 연구가 있다.
1300년부터 1600년까지 유럽 여러 지역과 동지중해의 실질임금 자료를 모은 2007년 연구는, 흑사병으로 시작된 인구 순환의 두 번째 구간에서 임금이 다시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고 저지대 국가들과 잉글랜드가 그 경향을 더 잘 버텨 냈다고 적는다. 1450년 이후 북서 유럽과 대륙의 나머지 사이에 임금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DOI: 10.1017/s1361491607002031).
「임금이 올랐다」의 정확한 형태는 이것이다. 올랐다가 대부분의 곳에서 다시 내려갔고, 몇몇 곳이 덜 내려갔다.
「북서 유럽이 앞섰다」는 그림 자체도 재는 방식에 따라 흔들린다.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의 물가·임금을 견준 2013년 연구는, 18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실질임금이 잉글랜드보다 높거나 대체로 같았고 — 14~15세기에는 높았고 16~17세기에는 대체로 같았다 — 잉글랜드가 이탈리아를 앞지른 것은 18세기 들어서였다고 보고한다. 같은 연구는 1800년 이전의 임금 격차 자체는 크지 않았고 그 뒤로 빠르게 벌어졌다고 덧붙인다 (DOI: 10.1093/ereh/hes022).
14~15세기라면 우리가 이야기해 온 바로 그 시기다. 그 시기에 이탈리아 실질임금이 잉글랜드보다 높았다는 결과는, 「흑사병 뒤 임금」 이야기를 잉글랜드 자료로만 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를 보여 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도시 몇 곳이 아니라 나라 단위로 견준 2019년 연구(1250~1860년)는 근세에 벌어지는 국면과 좁혀지는 국면이 함께 있었다고 적고, 1750년경 이전까지 프랑스 남성 노동력의 상당 부분에서 실질임금이 잉글랜드 수준과 대체로 대등했다고 본다 (DOI: 10.1017/s0022050719000354).
유럽 바깥에도 계열이 있다. 중세 이집트와 이라크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 구매력을 추정한 2014년 연구는, 임금이 두 번의 인구 충격 —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흑사병 — 과 더딘 인구 회복에 크게 영향을 받아 중세 대부분 기간 동안 최저 생계 수준 위에 머물렀다고 적는다 (DOI: 10.1017/s0022050714000072).
정리하면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다.
확인된 것. 흑사병 직후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에서 명목 품삯이 올랐고,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중반 사이에 두 나라의 실질임금이 뚜렷하게 올랐다 (DOI: 10.1016/s0363-3268(0321007-7). 노동을 규율하는 법이 잉글랜드에서 80년 동안 되풀이해 만들어졌고 그 첫 번째 목표가 품삯 억제였다 (DOI: 10.1017/9781846151385.006).
흑사병 이전에 잉글랜드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PMID 26174498; DOI: 10.1162/jinh_a_00500). 흑사병은 무차별하게 죽이지 않았다 — 다만 평상시 사망만큼 강하게 고르지는 않았다 (PMID 18227518,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 대 덴마크 두 도시). 그리고 흑사병의 타격이 유럽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PMID 35145268).
갈리는 것. 실질임금 상승의 주된 기전이 땅과 일손의 비율인지, 물가 하락과 품삯의 하방 경직인지 (DOI: 10.1484/m.tmc.5.103787). 흑사병 뒤 사람들의 몸이 실제로 나아졌는지 — 런던과 링컨셔 자료는 그렇다고 하고 (PMID 24806459; PMID 40737406) 케임브리지 자료는 극적인 변화가 없다고 한다 (PMID 41023128).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전적으로도 달라졌는지 (PMID 36261521; PMID 36993413).
아직 재지 않은 것. 흑사병이라는 충격에서 엘베강 동쪽의 제2차 농노제까지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 그 대비의 동쪽 팔은 여러 자료에서 관측되지만, 그 자료들의 시점은 1654년, 1500년부터 1800년까지, 그리고 17세기 이후다.
그리고 서유럽의 예속 해체가 실제로 임금 상승 때문이었는지도 재지 않았다. 이 글이 §0에서 검사하겠다고 내건 교과서 문장의 세 번째 고리가 바로 이것인데,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계열이 아니라 종설의 「연관된다」 한 줄이다 (DOI: 10.1257/jel.20201639, 종설).
이 글을 열었던 법령으로 돌아가자. 1349년 6월에 만들어진 그 규칙은 임금 인상을 막으려는 것이었고, 법전에서 지워진 것은 1814년이었다 (DOI: 10.1093/pastj/gtq032). 그 465년이 이 이야기의 실제 크기다. 「인구가 줄면 임금이 오른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르려는 힘과 누르려는 제도가 몇 세기 동안 지역마다 다른 결과를 낸 과정이었다.
그래서 「흑사병 뒤에 임금은 올랐나」에 한 단어로 답하려 하면 어느 쪽으로 답하든 틀린다. 답할 수 있는 것은 네 칸이 채워진 문장뿐이다. 어디서, 언제, 무엇을 재서, 누구의 임금이.
그리고 이 네 칸이 비어 있는 문장을 만나면 그것은 대개 누가 잰 것이 아니라 따져 본 것이다. 따져 본 것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검사를 통과했다는 뜻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용한 논문 전건이다. 기간이 흑사병 시기를 벗어나는 것, 모형 연구, 워킹페이퍼, 종설은 본문에서 그때마다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