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peris 아티클
누가 먼저 움직였나, 닉슨인가 마오인가 — 1972년 2월, 문서가 열린 뒤 다시 읽는 베이징 방문
회고록이 「삼각」이라 이름 붙인 논리, 뒤에 공개된 닉슨 테이프와 국무부 자료집, 중국에서 출판된 비밀 문서 — 이 글이 설계·구조·혼돈이라 부르는 세 갈래 해석이 각자 어떤 문서를 들고 있는지, 대만 「양보」 논쟁까지 판정 없이 따라간다
누가 먼저 움직였나, 닉슨인가 마오인가 — 1972년 2월, 문서가 열린 뒤 다시 읽는 베이징 방문
통념은 한 문장입니다. 닉슨과 키신저의 삼각 외교가 냉전의 판을 바꿨다. 삼각 외교는 미국·소련·중국 셋의 관계를 한 판으로 놓고, 한쪽과 가까워져 다른 쪽을 움직이려는 외교입니다. 판이 바뀌었다는 평가는 학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에벌린 고는 이 화해를 냉전기의 가장 중대한 전략적 전환이라 부르고, 워너의 2007년 논문은 세계의 힘 배치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그 판을 바꾼 논리가 「삼각」이었다는 그림은 두 사람이 직접 그렸습니다. 닉슨과 키신저의 글에서 미중 화해의 중심 논리는 「삼각 관계」였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그 뒤 문서가 열렸습니다. 미국 쪽에서는 닉슨의 녹음테이프, 키신저의 통화 기록, 국무부의 외교문서 자료집이 나왔습니다. 중국 쪽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2006년 사이에 비밀 문서와 당사자 기록이 출판됐습니다. 샤가 2006년에 쓴 「지난 20년」입니다 (DOI: 10.1162/jcws.2006.8.4.3). 이 글은 양쪽 문서를 놓고 한 물음을 따라갑니다. 누가 먼저 움직였나. 닉슨이 옳았는지, 마오가 옳았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이 글은 어느 문서가 어느 해석을 받치는지를 보여 주고, 판정은 하지 않습니다.
베이징의 첫날 — 1972년 2월 21일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베이징에 내렸습니다. 공산 중국 땅을 밟은 첫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2016년의 한 연구서 장이 센 수로, 두 나라가 맞선 지 22년 만이었습니다 (DOI: 10.1093/acprof:oso/9780198727507.003.0003). 닉슨과 키신저는 첫날 마오를 만났습니다. 아이젠버그의 2023년 연구서 장에 따르면 두 사람은 그 만남에 들떠 있었습니다. 방문은 미국에서 텔레비전 대형 행사였습니다. 같은 때 베트남에서는 에이브럼스 장군이 북베트남의 대규모 공세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닉슨은 남베트남에 대규모 폭격을 명령하면서 「평화의 사명」을 띠고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DOI: 10.1093/oso/9780197639061.003.0021).
이 장면 뒤에는 준비가 있었습니다. 같은 장에 따르면 키신저와 헤이그는 방문 전에 저우언라이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소련이 새로운 공세 노선에 들어섰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이 위협받으면 미국이 돕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같은 장은 마오가 소련을 상대로 미국이 돕겠다는 제안을 재미있어 했다고 적습니다. 헤이그는 닉슨의 평판을 높일 공동 문서를 미리 만들려 했습니다. 대통령과 함께 올 국무장관을 속이는 일에 저우를 끌어들이려고도 했습니다. 대만 지원을 약화하려는 태도는 국무부의 마셜 그린을 격분시켰습니다 (DOI: 10.1093/oso/9780197639061.003.0021).
「삼각 외교」는 미국 쪽이 부른 이름입니다. 2016년의 한 연구서 장은 마오가 소련에 맞서 미국과 힘을 합치려 외교를 조정했다고 적습니다. 닉슨은 전임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화해를 추구했다고도 적습니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가 중개자였습니다 (DOI: 10.1093/acprof:oso/9780198727507.003.0003). 방문은 공동 문서로 끝났습니다. 상하이 공동성명은 1972년 2월 28일 닉슨과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발표한 미·중 공동 문서입니다. 날짜는 1975년의 한 논문이 적은 것이고, 1977년의 논문은 27일로 적습니다 (DOI: 10.2307/2643340; DOI: 10.2307/2757828). 그 문안은 이 글의 마지막 절에서 봅니다. 먼저 그 전 3년으로 돌아갑니다.
두 책상 위의 선택지 — 워싱턴과 베이징
1969년 봄과 여름, 중국과 소련의 국경에서 무장 충돌이 났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닉슨 행정부가 베이징에 신호를 보낸 동기는 셋이었다고 버는 새로 해제된 미국 문서에서 읽어 냅니다. 베이징의 핵무기에 대한 우려, 소련이 힘의 균형을 위협한다는 걱정, 중국 시장에 대한 관심입니다 (DOI: 10.1080/713999930).
그 신호가 오간 길에 이름이 있습니다. 비밀 채널은 외교부처를 거치지 않고 지도자의 측근끼리 몰래 주고받는 연락선입니다. 버에 따르면 비밀 채널과 정규 외교 통로가 함께 양쪽의 관심을 키웠습니다. 특히 워싱턴이 어려운 대만 문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랬습니다. 같은 문서는 서로의 의심과 내부 정치 갈등이 접근을 가로막았음도 보여 줍니다. 불신은 이어지고 더 나아가기는 어려웠지만, 1969년에 양쪽이 화해를 향해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는 것이 버의 결론입니다 (DOI: 10.1080/713999930).
워싱턴의 정보기관은 이 움직임을 읽지 못했습니다. 1970년 11월 12일, 중앙정보국이 국가정보판단서를 냈습니다. 「베이징이 미중 관계의 조기 대폭 개선을 기대한다는 징후는 없다」고 적었습니다. 국가정보판단서는 정보기관들이 합쳐 내는 공식 판단 문서입니다. 몇 달 뒤 키신저가 베이징에서 돌아왔습니다. 대만을 비롯한 동맹국도, 정보기관 자신도 놀랐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8.00733.x).
미국 쪽 책상에는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1998년의 한 정책 논문은 닉슨과 키신저의 바람을 이렇게 읽습니다. 중국에 소련 공격을 막을 억지력을 주는 대가로 베트남 공산 세력을 압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논문에 따르면 두 나라는 각자 상대의 도움으로만 풀 수 있는 위기를 같은 때 맞았습니다. 그 논문은 이를 「역사의 우연」이라 부릅니다 (DOI: 10.1355/cs20_2c). 소련과의 관계도 있었습니다. 데탕트는 미국과 소련이 군비 협상과 정상회담으로 긴장을 늦추던 1970년대 초의 관계를 부르는 말입니다. 에벌린 고는 중국과의 화해가 소련과의 관계, 그리고 데탕트 정책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고 적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베이징의 책상은 다른 문서로 봅니다. 서구 학자들은 오래도록 한 가지를 가정했습니다. 마오와 저우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며 지도부 안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것입니다. 샤는 2006년 기준으로 지난 20년 사이 중국에서 출판된 비밀 문서와 당사자 기록으로 그 가정을 흔듭니다. 그가 살핀 1969년 1월부터 1972년 2월 사이, 최고 지도부, 특히 마오·린뱌오·저우는 소련의 위협을 상쇄하려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바람직하다는 데 뜻이 같았습니다 (DOI: 10.1162/jcws.2006.8.4.3). 위협의 내용은 2024년의 한 연구서 장이 셉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브레즈네프의 「제한 주권」 독트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의 치명적 국경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소련과의 다툼을 이념 논쟁에서 존재를 건 안보 위협으로 바꿨습니다. 모스크바는 워싱턴과 같은 급의 적이 됐습니다 (DOI: 10.4324/9781003427018-5). 1998년 논문은 당시 관찰자들의 믿음도 전합니다. 모스크바가 중국의 핵 능력을 겨냥한 「외과적 타격」을 진지하게 검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DOI: 10.1355/cs20_2c).
두 책상에 공통된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2011년의 한 논문은 세 나라 지도부가 저마다 더 옥죄는 국제 환경을 느꼈다고 봅니다. 미국에는 중국과의 접근이 베트남에서 물러날 길이었습니다. 중국에는 소련에 맞설 동맹을 만드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DOI: 10.1177/002070201106600206). 선택지가 양쪽 책상에 있었다는 것까지가 문서입니다. 누가 먼저 그 선택지를 집었는지가 다음 절입니다.
누가 먼저 움직였나 — 두 나라의 문서가 말하는 순서
미국 문서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터다의 책은 닉슨이 전임자들과 달리 중국과의 관계 복원이 서로에게 이익이라고 보고 결심했다고 주장합니다. 책 소개문에 따르면 닉슨은 논란 속에서도 계산된 수순으로 중국에 대한 무역·여행 제한을 조금씩 풀었습니다. 마오는 같은 방식으로, 다만 천천히 응답했습니다. 죄수를 풀어 주고, 미국 탁구팀을 초청하고, 키신저를 비밀리에 맞았습니다 (DOI: 10.1163/2468-1733_shafr_sim180130011). 워너의 2007년 논문은 1970년 말의 중국을 적습니다. 대통령 특사뿐 아니라 대통령 본인도 맞을 뜻을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1971년 봄, 탁구가 끼어들었습니다. 일본 나고야의 세계탁구선수권에 중국이 참가했습니다. 일본탁구협회 회장 고토 고지의 초청 때문이었다고 이토의 책은 적습니다 (DOI: 10.1057/9780230339354). 거기서 미국 선수와 중국 선수의 우연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DOI: 10.1177/0047117811411741). 4월 10일 미국 탁구팀이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4월 14일 저우언라이가 선수들과 동행 기자들을 만났습니다 (DOI: 10.1002/9781118885154.dipl0473). 핑퐁 외교는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의 중국 방문처럼 스포츠 교류로 나라 사이의 길을 트는 일을 부르는 말입니다. 이 이름을 설명한 2018년의 사전 항목은 화해가 보기만큼 갑작스럽거나 우연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그 밑에 「장기 원인」과 「단기 계기」가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DOI: 10.1002/9781118885154.dipl0473). 밀우드의 책은 역사가들이 키신저의 회담 기록은 거듭 읽으면서 이 교류는 지나쳤다고 봅니다. 교류가 외교 관계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 책의 주장입니다 (DOI: 10.1017/9781108935982).
1971년 7월 9일, 키신저가 파키스탄에서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날아갔습니다. 이틀 동안 저우언라이와 회담했습니다. 돌아와 닉슨에게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 회담은 「정부에서 가진 것 중 가장 철저하고 포괄적이며 중대한」 논의였다고 썼습니다. 「국제 관계의 중대한 새 출발」이라고도 했습니다. 에벌린 고에 따르면 앞서 비밀 채널이 있었어도 첫 방문은 미지로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이 정말 비적대적으로 상대할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키신저는 저우에게 경외에 가까운 인상을 받았습니다 (DOI: 10.1017/cbo9780511510472.008). 닉슨에게는 「이 과정을 우리가 다룰 수 있다면 혁명을 이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8.00733.x).
7월 15일 저녁, 닉슨이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키신저가 중국을 비밀 방문했고 자신이 이듬해 5월까지 베이징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네덜란드 라디오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중대한 뉴스」라 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경악했다」고 썼습니다. 닉슨은 뒤에 회고에서 이 방송이 세기의 가장 큰 외교적 놀라움을 낳았다고 적었습니다 (DOI: 10.1057/9780230348936_3). 닉슨 쇼크는 1971년 7월 15일 닉슨이 키신저의 비밀 방중과 자신의 방중 계획을 발표한 일을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일본에서는 한 달 뒤 달러의 금 태환 정지 발표까지 같은 이름으로 묶입니다 (DOI: 10.1163/187656108793645761).
10월에 키신저가 공개로 두 번째 방문을 했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10월 25일 유엔 총회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대표를 축출했습니다 (DOI: 10.4337/9781800880160.00014). 그 뒤 연락은 두 갈래였습니다. 키신저의 베이징 방문, 그리고 그 사이의 비밀 회동입니다. 회동은 처음에 파리의 중국 대사 황전과 가졌습니다. 중국이 유엔 대표권을 얻은 뒤에는 뉴욕의 중앙정보국 안가에서 유엔 대표 황화와 가졌습니다 (DOI: 10.1017/cbo9780511510472.009). 회담에서는 인도차이나 전쟁, 일본의 잠재적 위협, 소련과의 관계가 다뤄졌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고미네는 여기서 일본이 「카드」였다고 봅니다. 일본의 군사적 재부상 가능성과 그에 대한 중국의 오랜 두려움이 그 카드입니다. 닉슨과 키신저는 그것을 동아시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할 이유로 중국 지도자들에게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DOI: 10.1080/09592290903293837).

여기까지가 양쪽 문서가 보여 주는 순서입니다. 뤼티는 이 순서에서 「결정」을 찾는 일 자체를 의심합니다. 중국·옛 사회주의권·미국의 증거로 1969년을 다시 봤습니다. 세 나라 중 어느 쪽도 상대에 대한 계획된 정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분명한 노선을 그릴 통치 능력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대통령이 바뀌는 중이었습니다. 미국도 소련도 중국과 의미 있는 외교 관계가 없었습니다. 뤼티가 보기에 3월의 국경 충돌은 중국이 작은 섬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려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오해와 소통 부재, 과장된 위협 인식, 즉흥적 결정의 그물로 이어졌습니다. 1969년 말 베이징과 워싱턴 사이에 우호 관계가 시작된 것은 잘 짜여 실행된 정책의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뤼티의 결론입니다 (DOI: 10.1017/s030574101200046x). 통념이 말하는 「결정의 순간」은 이 문서들에 없습니다. 있는 것은 신호와 응답의 연쇄입니다. 그 연쇄를 설계로 읽을지 즉흥으로 읽을지가 갈립니다.
뒤에 열린 문서 — 회고록, 테이프, 자료집, 중국 쪽 기록
처음 열린 것은 당사자의 글이었습니다. 에벌린 고에 따르면 닉슨과 키신저의 글은 최근까지 이 정책 전환의 핵심 1차 기록이었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두 사람의 회고가 곧 역사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 자료집을 다룬 매슈 존스의 2008년 서평 논문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닉슨은 1971년 2월 백악관 집무실에 음성으로 작동하는 녹음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닉슨 시기 자료집은 그 테이프와 전화 통화 기록을 대량으로 옮겨 실었습니다. 키신저의 방대한 개인 문서는 의회도서관에 있으나 2008년 당시 일반 연구자에게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중국 편 자료집은 1999년에 편집이 끝났지만 기밀 해제 심사에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간행 연도는 이 글이 읽은 범위에 없고, 서평이 나온 2008년 이전인 것만 확실합니다. 1971년 10월 두 번째 베이징 방문의 전체 회담 기록은 전자판에 실렸습니다 (DOI: 10.1093/ehr/cen175). 이 글이 그 서평 논문에서 가져온 것은 문서가 언제 어떤 형태로 열렸는가까지입니다.
그 기록의 형태에 이름이 있습니다. 회담 비망록은 회담이 끝난 뒤 배석자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어 남긴 기록입니다. 밀우드의 책은 역사가들이 키신저와 중국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거듭 숙고해 왔다고 적습니다 (DOI: 10.1017/9781108935982). 터다의 책은 닉슨 테이프와 키신저 통화 기록을 써서 초기 미중 관계를 그린 첫 책이라고 소개문은 말합니다. 미국·중국·유럽·소련 문서고의 최근 해제 자료를 썼다고도 합니다 (DOI: 10.1163/2468-1733_shafr_sim180130011).
테이프가 보여 준 문장이 있습니다. 1972년 8월 3일, 닉슨은 키신저와 남베트남 상황을 논의했습니다. 민주당이 맥거번을 후보로 지명한 직후였습니다. 「아주 냉혹하게 보자. 소련·중국과의 우리 게임의 관점에서, 이 나라를 운영하는 관점에서 보면, 티에우에게 강요할 수 있는 거의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헨리,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끔찍하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키신저는 답했습니다. 「10월에 타결하면 74년 1월이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슈워츠는 이 대화가 남베트남의 미래를 닉슨의 재선 전망과 명시적으로 잇는다고 봅니다. 그 솔직함과 냉소가 놀랍다고 평합니다. 미군 철수와 남베트남 붕괴 사이의 「적당한 간격」을 두 사람이 추구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고도 봅니다 (DOI: 10.1111/j.1467-7709.2008.00759.x). 이 테이프는 베이징 방문 다섯 달 뒤의 것입니다. 2월의 결정에 선거가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는 이 테이프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2014년의 한 논문은 1972년 봄 북베트남의 부활절 공세 때를 적습니다. 그 논문에 따르면 닉슨과 키신저는 공세가 중국과의 화해와 소련과의 데탕트를 저울질하는 시도에 타격을 줄까 두려워했습니다. 11월 재선 전망도 해칠까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DOI: 10.1111/1468-2346.12102).
중국 쪽 문서는 다른 길로 열렸습니다. 버는 2001년에 양쪽의 당시 문서가 최근에야 쓸 수 있게 됐다고 썼습니다 (DOI: 10.1080/713999930). 샤가 2006년에 쓴 것은 중국에서 출판된 비밀 문서와 당사자 기록입니다 (DOI: 10.1162/jcws.2006.8.4.3). 뤼티는 2012년에 옛 사회주의권의 문서까지 더했습니다 (DOI: 10.1017/s030574101200046x). 대만 문제에서는 2005년 이후 해제된 문서가 한 해석을 뒤집으려는 데 쓰였습니다 (DOI: 10.1163/18765610-02503004). 해석이 바뀐 자리마다 새로 열린 문서가 있었고, 같은 문서를 두고도 해석은 갈립니다. 그것이 다음 절입니다.

세 갈래 해석 — 설계, 구조, 혼돈
닉슨과 키신저의 글이 첫 번째 해석의 출발점입니다. 이 글이 설계 해석이라 부르는 것은 두 사람이 소련을 겨냥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했다고 보는 설명입니다. 에벌린 고는 그 글에서 중심 논리가 삼각 관계였다고 적습니다. 중국을 소련과 분리된 세 번째 강대국으로 강대국 관계에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터다는 닉슨이 미국의 상대적 경제 쇠퇴와 해외 과잉 확장을 보고 더 현실적인 국제 틀을 바랐다고 봅니다. 그것이 소련의 군사적 전진을 두려워하고 국제 시장에 들어가려는 중국의 바람과 맞물렸다는 것입니다 (DOI: 10.1163/2468-1733_shafr_sim180130011). 워너의 2007년 논문은 방문의 상징적 충격이 막대했고 세계의 힘 배치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이 해석의 문서는 키신저의 보고와 회담 기록입니다. 약점은 카드가 작동했는가에서 나옵니다. 뤼티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의 파리 협상을 북베트남·중국·소련·동유럽·미국 다섯 쪽 사료로 읽었습니다. 중국은 베트남에서 아무 양보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북베트남 군사 원조를 늘렸다는 것입니다. 미중 화해는 베트남 협상에서 미국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DOI: 10.1162/jcws.2009.11.1.57). 출처 등급이 낮은 2026년의 한 논문도 같은 결론입니다. 닉슨 행정부가 북베트남에 대한 지렛대를 바라고 화해를 추진했으나 중국의 의미 있는 협력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DOI: 10.65161/recqnvhbodlwci4xq). 문서 공개 전에 쓰인 1998년 정책 논문은 반대로 봤습니다. 마오가 승인한 합의가 미국에 베트남에서의 「적당한 간격」을 줬다는 것입니다 (DOI: 10.1355/cs20_2c). 소련 카드는 에벌린 고가 1971년부터 1974년까지의 문서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답은 이 글이 다루는 범위 밖입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두 번째는 구조 해석입니다. 이 글이 구조 해석이라 부르는 것은 양쪽이 각자의 위협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보는 설명입니다. 중심 문서는 샤의 중국 쪽 기록입니다. 마오·린뱌오·저우의 합의가 거기 있습니다 (DOI: 10.1162/jcws.2006.8.4.3). 2011년 논문은 세 지도부가 모두 옥죄는 환경을 느꼈다고 보고, 「그러지 않았더라면」도 적습니다. 어느 지도자든 더 느슨한 환경을 느꼈다면 진전은 덜했으리라는 것입니다 (DOI: 10.1177/002070201106600206). 1998년 논문의 「역사의 우연」도 이 줄에 섭니다 (DOI: 10.1355/cs20_2c). 2008년의 한 연구서 장은 이 변화가 일어나고 나면 불가피해 보인다고 적습니다. 마오의 중국에서 여론은 잴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군·정부의 엘리트 가운데 오랜 동결의 끝을 환영할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DOI: 10.1093/oso/9780195315356.003.0006). 약점은 뤼티가 짚었습니다. 중국은 노선을 그릴 통치 능력이 없었습니다 (DOI: 10.1017/s030574101200046x). 샤의 기록이 중국에서 출판된 것이라는 점은 샤 본인이 밝힌 조건입니다 (DOI: 10.1162/jcws.2006.8.4.3).
세 번째는 혼돈 해석입니다. 이 글이 혼돈 해석이라 부르는 것은 뤼티의 설명입니다. 어느 쪽도 계획이 없었고 결과는 오해와 즉흥의 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DOI: 10.1017/s030574101200046x). 문서는 세 나라의 1969년 기록입니다. 약점은 그 뒤의 순서에서 나옵니다. 1970년 말이면 중국은 대통령을 맞을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터다는 닉슨의 제한 완화를 「계산된」 수순이라 부릅니다 (DOI: 10.1163/2468-1733_shafr_sim180130011). 2008년의 한 논문은 고든 창의 평가를 옮깁니다. 1949년 이래 미국의 최고 정책 결정자들은 공산주의가 한 덩어리라고 가정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소 마찰을 부추길 수단이 없다고 본 적도 없었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8.00733.x). 2018년 사전 항목의 「장기 원인」도 같은 쪽입니다 (DOI: 10.1002/9781118885154.dipl0473). 혼돈 해석은 1969년 한 해를 보고, 반대편은 그 앞뒤를 봅니다.
네 번째 자리는 국내 정치입니다. 슈워츠는 당파 정치가 미국 외교의 방향에 큰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근거는 8월 3일의 테이프입니다 (DOI: 10.1111/j.1467-7709.2008.00759.x). 2014년 논문의 재선 두려움도 여기 섭니다 (DOI: 10.1111/1468-2346.12102). 방문 당시를 두고는 아이젠버그의 2023년 장이 텔레비전 행사가 대통령의 이미지를 닦았고, 북베트남 공세 예상 때문에 베이징의 성공이 닉슨에게 필수였다고 봅니다 (DOI: 10.1093/oso/9780197639061.003.0021). 약점은 앞 절에서 봤습니다. 테이프도 2014년 논문의 공세도 방문 뒤의 것입니다. 무대를 넓히는 해석도 있습니다. 밀우드는 교류가, 고미네는 일본 카드가 결정자 둘의 틀 바깥에 있었다고 봅니다 (DOI: 10.1017/9781108935982; DOI: 10.1080/09592290903293837). 세 해석은 각자의 문서를 가졌고, 상대의 문서를 설명하지 못한 자리가 아직 갈리는 곳입니다.

합의된 곳과 아직 갈리는 곳 — 대만이라는 자리
1972년 9월 29일, 일본이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1975년의 한 논문은 그 경로를 적습니다. 7월 15일의 닉슨 발표, 10월의 유엔 표결, 2월 28일의 공동성명이 길을 열었습니다. 다나카 총리가 9월 베이징에 갔습니다. 일본은 11월 28일 타이베이 대사관을 닫았습니다 (DOI: 10.2307/2643340). 2021년의 한 연구서 장에 따르면 허를 찔린 사토 내각은 뒤늦게 중국에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DOI: 10.4324/b22785-3). 2020년의 한 논문에 따르면 일본은 닉슨 쇼크 전에는 미중 접근의 징후를 읽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는 미국보다 먼저 목표에 이르렀습니다 (DOI: 10.24833/2071-8160-2019-6-69-61-77). 미국의 수교는 1979년이었습니다 (DOI: 10.1111/j.1467-7709.2005.00500.x).
이 글이 읽은 문서들이 대체로 겹치는 자리는 넷입니다. 첫째, 1969년의 국경 충돌이 기회를 열었습니다. 워너의 2007년 논문, 버, 2024년 장, 2011년 논문이 모두 거기서 출발합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DOI: 10.1080/713999930; DOI: 10.4324/9781003427018-5; DOI: 10.1177/002070201106600206). 둘째, 워너의 2007년 논문이 적는 대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대만이었습니다. 미국이 지원하는 국민당 정부가 중국 전체의 합법 정부를 자처했고 유엔의 중국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셋째, 문서 연구는 중국이 베트남에서 양보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DOI: 10.1162/jcws.2009.11.1.57; DOI: 10.65161/recqnvhbodlwci4xq). 문서 공개 전의 1998년 정책 논문은 반대로 미국이 적당한 간격을 얻었다고 봤습니다 (DOI: 10.1355/cs20_2c). 넷째, 같은 워너의 논문이 적는 대로 두 나라 모두 바란 것을 다 얻지는 못했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갈리는 자리의 첫째는 이 글의 물음입니다. 누가 먼저 움직였나. 샤의 문서는 그가 살핀 1969년 1월부터 1972년 2월 사이 내내 중국 지도부의 합의를 보여 줍니다. 합의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거기 적혀 있지 않습니다 (DOI: 10.1162/jcws.2006.8.4.3). 버의 문서는 같은 해 닉슨 행정부의 신호를 보여 줍니다 (DOI: 10.1080/713999930). 뤼티는 어느 쪽에도 계획이 없었다고 봅니다 (DOI: 10.1017/s030574101200046x). 양쪽 문서는 각자 자기 쪽이 먼저 움직였다고 읽을 수 있는 기록을 갖고 있고, 그 둘을 하나의 순서로 합친 문서는 없습니다.
둘째는 대만 양보의 범위입니다. 힐턴의 2018년 논문이 요약한 바로는, 터커는 2005년에 닉슨과 키신저가 대만을 소모품으로 보고 대만의 미래나 지위를 돌보지 않은 채 필요 이상 양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은 터커의 원저를 읽지 않았습니다. 힐턴은 그 뒤 해제된 문서로 이 해석이 더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두 사람은 대만의 미래 지위를 실제로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키신저는 1971년 저우와의 논의에서 가능한 한 대만에 대한 원칙적 약속을 지켰다고도 봅니다. 「대만은 소모품이 아니었다」가 그 논문의 결론입니다 (DOI: 10.1163/18765610-02503004). 수교 추진이 논의되던 1976년에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1976년의 한 논설은 공동성명에 암묵적 약속이 있다는 주장에 맞섰습니다. 그 문서가 법적 구속력 있는 약속을 담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그 논설은 베이징과의 수교 추진을 「충실한 동맹의 배신」이라 불렀습니다 (DOI: 10.1080/00927678.1976.10554196). 문안은 이렇습니다. 1977년의 한 논문에 따르면 양쪽은 한 정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대만해협 양쪽의 모든 중국인이 중국은 하나뿐이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서는 공통 기반을 찾지 못했습니다 (DOI: 10.2307/2757828). 국무부가 협상에서 배제된 것이 막판 위기를 불렀습니다 (DOI: 10.1111/j.1468-2346.2007.00652.x). 마셜 그린의 격분은 앞에서 봤습니다 (DOI: 10.1093/oso/9780197639061.003.0021). 터커 쪽의 재반론은 이 글이 읽은 범위에 없습니다. 2005년 뒤 열린 문서를 다시 읽을 사람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셋째는 닉슨과 키신저의 몫입니다. 터다는 닉슨의 결심을 앞세웁니다 (DOI: 10.1163/2468-1733_shafr_sim180130011). 에벌린 고의 문서에서 채널과 회담을 움직인 사람은 키신저입니다 (DOI: 10.1017/cbo9780511510472.008; DOI: 10.1017/cbo9780511510472.009). 아이젠버그의 2023년 장에서 헤이그는 국무장관을 속이는 일에 저우를 끌어들이려 합니다 (DOI: 10.1093/oso/9780197639061.003.0021). 둘의 몫을 직접 저울질한 논문은 이 글이 읽은 범위에 없습니다.
넷째는 「그러지 않았더라면」입니다. 2011년 논문은 더 느슨한 환경이었다면 진전이 덜했으리라고 봅니다 (DOI: 10.1177/002070201106600206). 뤼티의 설명에서 결과는 계획이 아니라 오해와 즉흥의 그물에서 나왔습니다 (DOI: 10.1017/s030574101200046x). 밀우드는 교류가 외교 관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DOI: 10.1017/9781108935982). 이 글은 어느 물음에도 답하지 않습니다.
닉슨은 왜 베이징으로 갔고 마오는 왜 문을 열었는지는 이렇게 남습니다. 미국 문서에는 버가 읽은 세 동기가 있고, 선거는 방문 뒤의 테이프에만 있습니다. 중국 문서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두 문서가 같은 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문서가 열린 뒤 보이는 것입니다. 이 글이 들고 갈 한 줄은 하나입니다. 결정자가 둘이면 「누가 먼저」는 문서마다 다르게 답합니다.
근거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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