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문명은 한꺼번에 무너졌나 —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이어졌나
같은 전환이 유적마다 50년씩 어긋났다
남부 레반트의 네 유적에서 청동기 지층과 그 위 철기 지층의 경계를 방사성탄소로 따로따로 재 본 연구가 있다. 텔 베트셰안, 텔 레호브, 텔 라기스, 텔 미크네-에크론 —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 있는 발굴지들이다. 결과는 같은 전환이 유적마다 50~100년씩 어긋나 있다는 것이었다 (DOI: 10.1017/rdc.2018.58).
같은 연구가 두 가지를 더 적었다. 그리스풍으로 만든 채색 토기가 한 가지 색에서 두 가지 색으로 바뀌는 데 가나안 지역에서 100년 넘게 걸렸고, 그 변화는 남쪽 유적에서 먼저 일어난 뒤 북쪽 유적에서 나중에 일어났다. 저자들의 결론 문장은 이렇다 —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전환은 동시적이지 않으며, 토기 갖춤새를 근거로 유적끼리 연대를 맞추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 숫자가 낯설게 들린다면, 아마 이 연도를 먼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1177년.
이 연도를 제목에 올린 책이 있다. 그 책의 소개문은 기원전 1177년에 배를 타고 온 무리가 이집트를 침공했다고 적으며 시작한다 (DOI: 10.1515/9781400849987). 이 책은 널리 읽혔고, 그래서 이 사건에는 연도가 하나 붙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7년 뒤 학술지 지면에 직접 쓴 글을 보면 문장이 다르다. 그는 개정판에 새 자료를 넣으면서도 청동기의 끝을 설명할 단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없다고 계속 믿는다고 적었고, 그 시대를 끝낸 것은 여러 재난이 겹친 「완벽한 폭풍」이었다고 썼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1). 대중이 물려받은 것은 연도였고, 저자가 쓴 것은 복수의 원인이었다.
이 글은 그 어긋남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원인을 따지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셋 있다고 본다 — 무엇이 끝났나, 어디서 끝났나, 언제 끝났나. 이 셋이 갈라지지 않으면 네 번째 물음인 왜 끝났나는 아예 물을 수가 없다.
「붕괴」라는 한 낱말이 뭉개는 것들
먼저 시대 이름부터. 후기 청동기는 동지중해에서 구리와 주석을 섞은 청동이 무기와 연장의 주재료였던 마지막 시기이고, 대략 기원전 155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를 가리킨다. 구리와 주석은 한자리에서 함께 나는 법이 거의 없어서, 청동을 쓰려면 멀리서 실어 와야 했다 — 이 시기의 왕국들이 서로 물려 있었던 것은 취향이 아니라 재료 때문이었다. 그 뒤 기원전 1200년부터 900년까지가 초기 철기다 (PMID 27627996).
이 시기의 정치·경제 단위를 부르는 이름이 하나 더 필요하다. 왕궁 체제는 곡식과 기름과 금속을 왕궁이 거둬 창고에 쌓았다가 장인과 병사와 사제에게 다시 나눠 주는 방식으로 굴러가던 살림 구조를 말한다. 그 나눠 준 내역이 점토판 장부에 적혀 남았는데, 이 장부가 있다는 것은 곧 그 지역에 왕궁이 있었다는 뜻이고 장부가 끊긴다는 것은 왕궁이 끝났다는 뜻이지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 구분이 이 글의 읽기 규칙이다. 「붕괴했다」는 한 문장 안에 최소한 다음이 뭉쳐 있다 — 왕궁 체제가 멈춘 것, 장거리 교역이 줄어든 것, 도시와 마을이 불탄 것, 정착지의 수와 크기가 줄어든 것, 그리고 문자가 끊긴 것. 이것이 전부라는 뜻은 아니고, 이 다섯이 같은 곳에서 같은 때에 함께 일어났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아래에서는 문장마다 무엇이 끝났는지를 적는다.
이 분야의 종설 한 편이 그 이유를 미리 적어 두었다. 동지중해 위기의 설명은 「셀 수 없이 많고」, 그 변화들 중 일부는 기원전 13세기 중후반부터 12세기 내내 서로 다른 시점에 일어났으며, 물증도 문헌도 기후 자료도 연대도 모호해서 배경 잡음과 경계 조건을 가려내기가,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가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DOI: 10.3764/aja.120.1.0099, 종설).
통설은 파라오의 벽에서 왔다
「바다 민족」은 이집트 신전 벽에 새겨진 승전 기록이 배를 타고 몰려온 적들을 뭉뚱그려 부른 이름이다. 이 낱말을 쓰는 글들도 「…라고만 알려진 무리」처럼 남이 붙인 이름임을 드러내며 쓴다 (DOI: 10.1515/9781400849987). 적을 이겼다고 자랑하려고 적는 글에 붙은 이름이라, 이 낱말은 어떤 집단의 이름이라기보다 그 벽을 새긴 쪽이 세상을 어떻게 정리해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앞에서 그 책의 소개문이 「배를 타고 온 무리」라고만 적은 상대에게 붙은 이름이 이것이다.
키프로스 자료를 다룬 논문 한 편이 통설의 모양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집트의 부조와 상형문자·설형문자 기록들은 붕괴의 직접 원인을 나일 삼각주와 튀르키예 해안과 시리아·팔레스타인 내륙으로 밀고 들어온 「바다에서 온 사람들」의 침입으로 그려 낸다는 것이다 (PMID 23967146). 중요한 낱말은 「그려 낸다」다 — 저 기록들이 그렇게 적고 있다는 뜻이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기록을 정면으로 검사한 논평이 있다. 람세스 3세의 신전 벽에 새겨진 문구는 「바다 민족」이 히타이트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파괴했다고 적는데, 대부분의 연구자는 히타이트 제국이 그들에게 무너졌다고 보지 않으며 히타이트의 수도는 그 시점에 이미 비워진 뒤였다는 것이다. 같은 벽은 아르자와도 파괴했다고 적지만 아르자와는 그 무렵 이미 존재하지 않았고, 카르케미시도 파괴했다고 적지만 카르케미시는 파괴되지 않고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이어졌다. 논평의 저자는 그 벽을 새긴 사람들의 목적이 신들에게 파라오에 대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었지 해외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적는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학술지 포럼 논평).
여기서 통설의 두 번째 기둥이 나온다. 파괴층은 옛 도시를 발굴할 때 나오는, 불에 탄 재와 무너진 벽돌이 두껍게 깔린 지층을 말한다. 그 자리에서 무언가 크게 탔다는 것은 알려 주지만 누가 불을 질렀는지도, 옆 동네가 같은 해에 탔는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 그 두 가지는 다른 방법으로 따로 재야 한다.
그리고 그 「따로 재는 일」이 지난 20년 동안 세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나이테가 말한 세 해
첫 번째 방향은 날씨다. 고기후 프록시는 옛날 날씨를 직접 잰 기록이 없을 때, 날씨에 따라 달라진 자연물의 흔적을 대신 재서 그때가 가물었는지 축축했는지를 읽어 내는 자료다. 가문 해에 좁아진 나무의 나이테, 동굴 바닥에서 천천히 자란 석순의 굵기와 성분, 호수 바닥에 층층이 쌓인 꽃가루가 대표적인데, 셋은 서로 다른 시간 단위로 자라서 같은 사건을 재도 눈금이 다르다.
2023년 한 연구팀이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자란 향나무의 나이테 너비와 안정동위원소를 함께 읽었다. 그 자료에서 기원전 1198년부터 1196년까지(±3년) 이례적으로 심한 가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 구간이 잡혔다. 저자들은 그것이 임계점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고 적었고, 여러 세기 동안 쌓아 온 위험 분산 관행을 압도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을 알린다고 썼다 (DOI: 10.1038/s41586-022-05693-y).
이 논문의 제목에 들어 있는 낱말을 그대로 옮길 필요가 있다. 제목은 가뭄이 히타이트의 붕괴와 동시에 일어났다고 적지, 가뭄이 히타이트를 무너뜨렸다고 적지 않는다. 저자들 자신이 본문 앞머리에서 그 이유를 말한다 — 기원전 1200년 무렵의 300년짜리 완만한 한랭·건조화는 여러 문명의 붕괴와 자주 연결되어 왔지만, 고고·역사 기록에는 인간 사회가 그런 완만한 기후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례가 여러 번 있다는 것이다.
두 해 뒤 다른 자료가 같은 창을 가리켰다. 이스탄불 근처 우준타를라 동굴에서 자란 석순 하나를 10년보다 촘촘한 단위로 읽은 연구인데, 이 기록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조 이상이 기원전 1210년에서 1170년 사이에 나타났고 저자들은 이것이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와 시기가 겹친다고 적었다 (DOI: 10.1016/j.quascirev.2025.109365, 석순 한 개).
같은 방향을 가리킨 자료들
가뭄 쪽 증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바닥에서 뽑은 시추 코어를 대략 40년에 한 점씩 꽃가루로 읽은 연구가 있다. 청동기와 철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건조했던 구간이 기원전 1250년에서 1100년 사이로 나왔고, 지중해성 나무의 비율이 크게 떨어진 것이 그 근거였다 (DOI: 10.1179/033443513x13753505864205). 같은 논문은 고고 자료 쪽도 함께 적는다. 동지중해의 위기가 같은 시기에 — 기원전 13세기 중반부터 1100년 무렵까지 — 일어났고, 레반트에서 그 위기의 해들은 많은 수의 도시 중심지가 파괴된 것과 주요 유적들의 축소, 은닉 행위, 정착 양상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논문이 곧바로 덧붙이는 대목이 하나 더 있는데, 이 건조기 뒤에 철기 I에는 지중해성 나무와 재배 올리브가 함께 늘어나는 뚜렷한 회복이 왔다는 것이다.
시리아 해안에서는 기발라-텔 트웨이니 유적 옆 충적층의 꽃가루를 읽었다. 기원전 13세기 말·12세기 초부터 9세기까지 더 건조한 조건이 이어졌다는 결과였다. 같은 연구는 기발라의 첫 번째 대화재가 우가리트 파괴와 동시에 일어났다고 적으면서 우가리트의 파괴 연대를 기원전 1194년에서 1175년 사이로 든다 (DOI: 10.1016/j.yqres.2010.07.010). 저자들이 쓴 동사는 「일으켰다」다 — 급격한 기후 변화가 광역 흉작을 일으켰고, 그것이 사회경제적 위기로 이어져 사람들이 살 곳을 옮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가 가뭄 가설을 촉발 요인으로서 뒷받침한다고 적는다.
그런데 같은 연구가 그다음 문장에서 적는 것이 이 글의 논점을 미리 보여 준다. 기발라는 그 파괴 직후에 다시 세워졌다. 초기 철기 I 동안 두 번의 큰 건축 단계에 걸쳐 대규모 도시화가 진행됐고, 그 도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2,950년 전에 두 번째 화재로 다시 탔다. 파괴층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그 사이에 도시가 있었다는 뜻이다.
북서 시리아 야블레 평야의 800센티미터짜리 시추 코어를 읽은 연구는 더 건조한 쪽으로의 큰 이동을 두 번 잡아냈고, 그중 나중 것이 더 건조하고 더 오래갔다. 다만 그 국면을 특징짓는 것은 기원전 1100년에서 800년 사이의 따뜻한 스텝 식생과 기원전 900년의 뜨거운 사막 식생 정점이다 — 왕궁들이 끝난 시점보다 수백 년 뒤다. 같은 논문은 우가리트의 파괴와 우가리트 왕국의 종말을 기원전 1190년에서 1185년 무렵으로 적는다 (DOI: 10.1073/pnas.0803533105). 앞 문단의 논문은 같은 사건을 기원전 1194~1175년으로 적었다. 두 값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이 분야의 연대가 실제로 어떤 폭으로 오가는지를 보여 준다.
앞에서 이집트 기록의 서술을 요약하는 자리로 인용했던 키프로스 논문은, 자기 결론에서 훨씬 멀리 나간다. 저자들은 키프로스와 시리아에서 급격한 기후 변화가 몰고 온 기근의 영향과, 그것과 「바다 민족」 침입 사이의 인과 연결을 자료가 드러낸다고 적는다 (PMID 23967146).
여기서 어법 자체가 갈린다. 앞 절의 나이테 논문은 제목에 「동시에 일어났다」를 썼고, 이 절의 시리아 해안 논문과 키프로스 논문은 「일으켰다」와 「인과 연결」을 쓴다. 같은 세기, 겹치는 지역인데 저자들이 고른 동사가 다르다. 이 글은 그 차이를 평준화하지 않는다.
이 흐름을 모은 종설 한 편은 필로스에서 가자에 이르는 해안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그 뒤 자주 비워진 채로 남았다고 적고, 번영을 떠받치던 국제 교역망이 그렇게 끝났다고 적는다. 다만 같은 종설이 이어서 적는 문장도 함께 옮긴다 — 그 뒤에 나타난 농촌 정착지들은 농목축을 바꿔 가며, 제한된 장거리 교역을 하며 대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종설이 가뭄에 대해 쓴 동사는 「무너뜨렸다」가 아니라 「앞당겼을 수 있다」이다 (DOI: 10.1002/wcc.345, 종설).
같은 자료가 지역마다 다른 답을 준다
두 번째 방향은 그 가뭄 자료 자체를 다시 재는 일이었다.
2022년 한 연구팀이 동지중해에서 해상도가 가장 높은 고기후 기록들을 모아 방사성탄소 연대를 하나의 일관된 시간축으로 다시 보정하고, 바다와 육지 퇴적물에서 나온 꽃가루와 산소·탄소 동위원소를 함께 써서 건조도를 50년 해상도로 재구성했다. 저자들의 결론 문장은 짧다 — 이 결과는 「기후가 사회를 파괴했다」는 단순한 가설에 도전한다. 대신 건조도와 사회의 반응이 훨씬 복잡하게 오간 기록이 나왔다는 것이다 (DOI: 10.1080/01916122.2022.2067259).
2026년에 나온 기후 모형 연구는 그 「복잡함」의 모양을 하나 제시한다. 홀로세 전 기간을 돌린 모의실험에서 건조화는 지역에 따라 고르지 않게 나타났고, 레반트에서는 건조가 계속됐지만 발칸과 아나톨리아 일부에서는 오히려 실효 수분이 늘었다는 것이다 (PMID 42497264, 기후 모형 시뮬레이션). 같은 연구도 기원전 1250년 무렵 심한 가뭄이 있었다는 프록시 기록 자체는 전제로 삼는다. 다투는 것은 그 가뭄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한 장의 지도였느냐다.
그리스 쪽에서는 반대 방향의 실측이 있었다. 앞에 나온 논평은 미케네 왕궁 가운데 하나인 필로스 근처 동굴의 석순을 읽은 연구를 인용하는데, 그 연구의 결론은 그리스 본토의 새 고기후 증거가 필로스 왕궁의 파괴와 더 건조한 조건 사이의 뚜렷한 연대 일치를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오히려 붕괴 이전이 더 습했고 이후가 더 건조했다. 논평의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기후 변화 없이, 기후 변화 이전에 일어난 왕궁 붕괴가 적어도 하나 있는 셈이고, 그 붕괴 직전까지 그 왕궁의 점토판 장부는 여전히 곡식 배급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학술지 포럼 논평).
펠로폰네소스를 다룬 연구 두 편이 다른 각도에서 같은 곳을 짚는다. 하나는 건조한 기후가 곧 나쁜 사회 변화를 뜻하지는 않으며, 좋은 기후 조건이 단기적으로 유리하면서 동시에 결국 지속 불가능한 경제를 떠받칠 수 있다고 적는다. 이 연구는 후기 청동기의 끝을 그 시기 이전 단계에서 이미 벌어진 사회-환경의 어긋남에 비추어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DOI: 10.1080/00438243.2018.1515035). 다른 하나는 9,000년 치 자료를 모아 정착지 수가 선사에서 역사 시대로 오며 네 배로 늘었다는 것을 보이면서, 사회의 팽창기와 유리한 기후 시기 사이에 일반적인 연관을 지을 수 없다고 적는다. 정착지의 수와 크기가 줄어든 시기가 알려진 기후 사건과 대략 겹치기는 하지만, 연대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지는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DOI: 10.1016/j.quascirev.2015.10.042).
아나톨리아 중부 나르 괼뤼 호수의 해마다 쌓인 퇴적층을 읽은 학위논문 한 편은 청동기와 초기 철기가 홀로세를 통틀어 가장 건조한 시기였다고 적으면서도, 홀로세의 어느 시점에서도 기후 변동이 사회 변화의 유일한 동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DOI: 10.24382/1964, 박사학위논문).
작물 쪽에서는 다른 종류의 반증이 나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유적 33곳과 현대 경작지 13곳에서 보리 낟알의 탄소동위원소를 재 가뭄 스트레스를 복원한 연구다. 가뭄 스트레스는 여러 농경 취락에서 실제로 문제였지만, 동시에 그 지역별 영향이 다양했다. 북부 레반트 해안의 곡물은 홀로세 기후 변동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고, 더 내륙의 농민들은 물 스트레스에 대응해 관개를 해야 했다 (DOI: 10.1073/pnas.1409516111).
언제였나 — 연대가 흔들리면 인과도 흔들린다
세 번째 방향은 시계 자체를 다시 맞추는 일이었다. 이 방향이 이 글의 제목에 있는 「한꺼번에」를 정면으로 겨눈다.
방사성탄소 연대 보정은 숯이나 씨앗에 남은 탄소를 재서 나온 값을 실제 연도로 옮기는 작업인데, 대기 중 탄소의 양이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에 그냥 계산해서는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옮기는 데 쓰는 곡선이 평평해지는 구간이 있어서, 하필 그 구간에 걸린 시료는 아무리 정밀하게 재도 「이 100년 안 어딘가」까지밖에 좁혀지지 않는다 —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자리가 바로 그런 구간이다.
이 제약을 알고도 그 구간을 파고든 연구가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텔 에스사피/가트에서는 이른바 「블레셋 토기」가 나타나는 시점을 물었다. 이 토기는 관례상 기원전 12세기로 잡혀 왔는데, 연구팀은 미세고고학 기법으로 시료가 원래 자리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한 뒤 층서 정보를 넣은 베이즈 모형으로 계산했다. 나온 답은 기원전 13세기였다 (DOI: 10.2458/azu_rc.57.18391). 「붕괴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의 토기」로 여겨지던 것이, 적어도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2세기가 오기 전에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메기도에서는 후기 청동기와 철기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는 토기 편년 7단계와 층서 10개에 대해 시료 78개에서 얻은 측정값 190개로 베이즈 연대 모형을 세웠다. 저자들은 이것이 레반트의 단일 유적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방대한 방사성탄소 측정 세트라고 적는다 (DOI: 10.2458/56.16899).
튀르키예 남동부의 텔 타이나트에서도 같은 일이 이루어졌다. 이 유적은 청동기가 끝나는 무렵과 그보다 1,000년 앞선 또 한 번의 전환기에 모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논문이 이유로 적은 문장이 정확하다 — 유적의 궤적을 넓은 지역 서사와 견주려면 먼저 그 유적의 시간표가 확보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MID 33119717). 이 논문은 가뭄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견줄 수 있는 눈금을 먼저 만든다.
방법 쪽의 한계도 함께 적혀 있다. 이 접근을 정리한 논문은 잘 확립된 원래 자리에서 나온 시료만 써야 한다고 못 박으면서, 지금 잴 수 있는 것이 탄 씨앗과 올리브씨 같은 단명 시료와 뼈의 콜라겐뿐이라는 것을 주요 제약으로 든다 (DOI: 10.2458/azu_rc.57.18554).
그리고 이 절의 하중이 가장 큰 주장 — 이 글을 연 그 50~100년 — 에는 정면 반론이 붙어 있다. 세 편의 논문을 함께 검토한 한 논평은 그중 첫 번째를 「이웃한 유적들에서 후기 청동기/철기 I 전환이 100년 이상 벌어져 일어났다고 제안한」 연구로 요약한 뒤, 방법과 사실을 따져 보면 세 이론 모두 기각된다고 적는다 (DOI: 10.1080/00310328.2020.1738145, 논평). 이 글은 그 반론을 지우지 않는다. 유적별 연대가 정말 어긋나는가는 지금도 논쟁 중이고, 아래 §「아직 안 풀린 것」에서 다시 돌아온다.
끝난 것은 왕궁이었다
이제 첫 번째 물음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끝났나. 미케네 쪽부터 보자. 이 시기를 다룬 개설서 한 장은 관례상 기원전 1190년 무렵으로 잡히는 시점에 미케네의 왕궁기가 극적으로 끝났으며 왕궁들이 파괴되고 왕궁 체제가 무너져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고 적는다. 그러나 같은 장이 곧바로 덧붙인다 — 점점 분명해진 것은 그 체제의 붕괴가 훨씬 이전에 시작된 과정의 결과라는 점이고, 그보다 한 단계 앞선 시기에 이미 첫 파괴들이 있었으며 미케네와 티린스의 그 파괴들에 대해서는 지진이 지목되어 왔다는 것이다 (DOI: 10.1017/ccol9780521814447.018, 개설서 장).
아나톨리아로 가면 그림이 더 갈린다. 히타이트 수도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차드르 회위크를 발굴한 연구는 이 유적에서 후기 청동기의 전형적인 히타이트 물질문화 — 대량 생산 토기와 거대한 성벽 — 를 확인하는 한편, 초기 철기에 이곳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거기에 맞춰 살림을 바꿨다는 증거를 함께 보고한다. 건축과 토기와 동물뼈가 가리키는 것은 주거의 연속, 문화적 회복, 기술과 경제의 조정이었고, 저자들은 그것이 주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살아남고 되살아나게 했다고 적는다 (DOI: 10.1080/00934690.2018.1558906). 같은 지역 세 유적의 토기를 분석한 연구도 차드르 회위크의 문화적 연속을 시사하는 증거를 보고하면서, 히타이트 붕괴 이후의 지역별 반응이 서로 달랐다는 점을 강조한다 (DOI: 10.1017/s0066154600001022).
히타이트의 옛 수도 자리인 보아즈쾨이는 특히 흥미롭다. 다만 보아즈쾨이가 곧 하투사라는 동정은 아래 초록들에 없는 교과서 사실이다. 앞의 논평은 「바다 민족」이 히타이트의 수도를 무너뜨렸다는 그림에 대해 그 수도가 그 시점에 이미 비워진 뒤였다고 적었는데, 발굴 쪽 연구는 그 이후로도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종래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철기시대에 토기 생산과 교역의 규모와 복잡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다만 같은 연구가 붙이는 조건이 무겁다 — 보아즈쾨이가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유의미한 정치체로 다시 떠오른 것은 히타이트 붕괴로부터 500~700년이 지난 후기 철기에 이르러서라고 저자들은 제안한다 (DOI: 10.1111/j.1468-0092.2009.00329.x).
그리스의 엘레우시스는 이 구분을 한 유적 안에서 보여 준다. 미케네 왕궁들이 무너진 뒤 엘레우시스의 취락은 줄어들었지만 계속 사람이 살았고, 그 자리의 큰 건물은 기원전 8세기에 데메테르 숭배가 도입될 때까지 서 있었다. 그런데 같은 논문의 결론 마지막 대목을 빼면 안 된다 — 기억은 보존됐지만 의례의 본질은 크게 바뀌었고, 그것은 기능의 연속에 반한다는 것이다 (DOI: 10.3764/aja.118.3.0401). 장소는 이어졌고 하던 일은 이어지지 않았다.
시계를 다시 맞춘 연구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고르디온에서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 맥락의 연대 15개를 새로 잰 연구는, 이 유적의 그림이 기원전 12세기의 히타이트 지배로부터의 이탈에서 기원전 9세기 초 프리기아 수도의 이른 등장으로 바뀐다고 적는다 (DOI: 10.1017/rdc.2018.152). 아르슬란테페에서는 철기 층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13세기 중반으로 나왔고, 저자들은 이것이 이 유적이 히타이트 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레반트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음을 함의한다고 적는다 (DOI: 10.1017/rdc.2021.19).
사람이 바뀌었나 — 이 한 무덤에서는 아니었다
첫 번째 물음에는 딸린 물음이 하나 있다. 사람이 갈렸나.
이것을 직접 잰 연구가 있다. 스트론튬 동위원소는 땅마다 조금씩 다른 비율로 섞여 있는 원소인데, 그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자란 사람의 이에 그 비율이 그대로 박힌다. 이는 어릴 때 만들어지고 그 뒤로는 바뀌지 않아서, 묻힌 자리의 값과 이의 값을 견주면 그 사람이 그 동네에서 자랐는지 밖에서 들어왔는지를 가를 수 있다.
연구팀은 남부 레반트 텔 도탄의 초기 철기 무덤 하나에서 나온 어금니 43개의 스트론튬·산소·탄소 동위원소를 쟀다. 세 값 모두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저자들의 첫 번째 결론은 이렇다 — 텔 도탄에 외지인이 없다는 것은 인구 교체가 고고 기록에 보이는 사회정치적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PMID 27627996, 단일 유적·무덤 하나·어금니 43개).
그런데 같은 논문의 두 번째 결론이 방향이 반대라서 이것도 함께 옮겨야 한다. 값들이 이렇게 고른 것은 이 공동체가 이동성이 높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따라서 중앙 권력이 흩어지면서 사람들이 더 유동적인 삶으로 옮겨 갔다는 그림이 이 시기 모든 집단의 대응 전략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침입설」만 깎아내리는 논문이 아니라 「탈중심화설」의 일반화도 함께 깎아내린다.
이주 쪽에도 연대 문제가 있다. 신히타이트 국가 히야와의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연구는, 그 나라 주민 가운데 그리스어를 쓰던 부분이 히타이트 제국 붕괴 직후에 도착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저자는 그들이 키프로스에서 왔고 페니키아 문자를 함께 들여왔다고 제안한다 (DOI: 10.1515/9783110601268-009). 위의 논평 역시 같은 방향을 다른 근거로 밀어붙인다 — 이 시기 지중해에는 평상시의 이동성이 있었고, 그것이 주기적인 대이동이나 침입보다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더 적절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논평은 이 서사의 기본적인 결함 하나를 지적한다. 가뭄과 기근과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왜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가겠느냐는 것이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학술지 포럼 논평).
물질문화 쪽에서는 그림이 더 섞인다. 튀르키예 남동부 텔 타이나트에서 나온 에게해풍 채색 토기를 다룬 단행본이 있는데, 이 책의 소개문은 그 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명문 자료가 아나톨리아 상형문자와 에게해풍 요소가 결합된 초기 철기 왕국의 형성을 시사한다고 적는다 (DOI: 10.1163/9789004370173, 단행본 소개문). 초록 자리에 실린 것이 출판사 소개문이라 이 글은 이것을 발견의 근거로 쓰지 않고, 그런 연구가 있다는 사실로만 든다.
붕괴 이후는 공백이 아니었다
「무엇이 끝났나」에는 나머지 절반이 있다 — 무엇이 이어졌나. 그것이 두 번째 물음인 어디서 끝났나로 이어진다. 종설 하나는 이 시기 뒤에 대해 역사가들이 300년짜리 암흑기를 이야기해 왔다고 적는다 (DOI: 10.1002/wcc.345, 종설). 그 300년에 실제로 무엇이 있었는지를 잰 연구들이 있다.
남부 요르단에서 나온 것이 특히 선명하다. 남부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시대 구리 생산지를 고정밀 방사성탄소로 잰 연구는 기원전 10세기와 9세기에 대규모 제련이 이루어졌음을 보였고, 새 연대가 이 지역의 기존 편년을 200년 앞당겼다고 적는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 산업의 부상을 후기 청동기 문명들의 붕괴가 만든 권력 공백, 그리고 동지중해를 지배하던 키프로스 구리 독점의 해체와 연결한다 (DOI: 10.1073/pnas.0804950105). 장거리 교역망이 끊어진 자리에서 다른 곳의 산업이 커졌다는 뜻이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북시리아에서는 정치체가 다시 생겼다. 이 지역을 다룬 개설서 한 장은 기원전 1180년 무렵부터 기원전 6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등장한 나라들을 다루는데, 그 대부분이 하나의 도시와 그 배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적는다. 그리고 그 역사를 재구성하는 자료로는 아시리아 왕실 명문이 주축이고, 여기에 아나톨리아 상형문자나 서셈계 알파벳으로 적힌 현지 자료가 더해진다고 적는다 (DOI: 10.1093/oso/9780190687632.003.0046, 개설서 장).
같은 지역을 다룬 논문 한 편은 그 과정을 더 밀어붙인다. 저자는 후기 청동기 말에 제국의 권력 중심이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카르케미시와 타르훈타사 쪽으로 점진적으로 남하했다고 보면서, 히타이트 제국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뒤이은 암흑기라는 널리 퍼진 모형에 반대한다고 적는다. 그리고 말라티아-엘비스탄 평야에서 초기 철기의 첫 세기들 동안 자리 잡은 말리지/멜리드를 히타이트 제국의 잿더미에서 나온 가장 이른 정치체 중 하나로 제시한다 (DOI: 10.1558/jmea.v24i1.55).
그리스에 대해서도 앞의 논평이 지우기 쉬운 사실을 하나 적어 둔다. 기원전 1200년 이전의 후기 청동기 그리스는 상당 부분이 애초에 왕궁 지역이 아니었고, 아카이아·코린티아·동로크리스·포키스·말리스 같은 지역과 에게해 섬들은 붕괴 없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논평의 저자는 카르케미시가 파괴되지 않고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이어졌다는 점, 그리고 이집트를 겨눈 공격이 실패로 끝났다는 점도 함께 적는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학술지 포럼 논평). 이 구분에 기댄 것이 이 논평만은 아니다 — 미케네 왕궁 사회의 붕괴를 다룬 단행본 하나도 왕궁 지역과 비왕궁 지역의 차이를 분석 축으로 삼는다고 소개한다 (DOI: 10.30861/9781407306513, 단행본 소개문).
앞에 나온 문자 이야기도 여기서 갈라야 한다. 아나톨리아와 북시리아에서는 아나톨리아 상형문자와 서셈계 알파벳이 초기 철기의 기념비와 문서에 계속 쓰였다 (DOI: 10.1093/oso/9780190687632.003.0046). 히야와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던 지배 가문이 기념비를 세우려고 페니키아 문자를 빌려 왔다 (DOI: 10.1515/9783110601268-009). 그리스 쪽 문자의 존폐에 대해서는 이 글이 읽은 논문들 가운데 그것을 잰 것이 없다. 「문자가 사라졌다」는 문장은 적어도 지역을 나눠 다시 물어야 한다.
아직 안 풀린 것
세 번째 물음인 언제 끝났나는 앞에서 이미 다뤘다 — 한 해가 아니라 폭이었다. 남은 것은 네 번째 물음이다. 왜 끝났나. 여기에는 아직 답이 없고, 그 이유는 네 갈래로 나뉜다.
첫째,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과 원인이라는 것은 다르다. 앞에서 본 히타이트 가뭄 논문의 제목이 쓴 낱말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고기후 프록시가 잴 수 있는 것은 그때 가물었는가이지 그 가뭄이 무너뜨렸는가가 아니다. 이 간극이 실제로 벌어진 사례가 있다. 서부 튀르키예의 곡물에서 탄소동위원소를 잰 연구는 이 시기보다 1,000년쯤 이른 기원전 2200년 무렵의 건조기를 대상으로 삼았는데, 청동기 농민들이 가뭄에 강한 곡물을 더 마른 밭에 심고 물 관리를 콩류 쪽으로 돌리는 식으로 농사를 바꿨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같은 논문이 함께 적은 것이 있다 — 그 건조기 동안 자란 곡물에서 두드러진 가뭄 스트레스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저자들은 그래서 당시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보이는 사회적 교란에 다른 설명 — 이를테면 장거리 교역망의 붕괴 — 이 가능해진다고 적는다 (PMID 37291270). 하늘이 가물었다는 자료와 밭이 말랐다는 자료는 서로 다른 자료다.
같은 방향의 지적이 다른 분과에서도 나왔다. 「붕괴 고고학」 문헌이 심한 가뭄은 반드시 제도 위기를 부른다는 통념에 부합하는 상관을 수없이 보고해 왔는데, 청동기 메소포타미아의 더 자세한 자료에 기댄 연구들이 최근 그 결론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PMID 33790012, 종설·대상은 메소포타미아).
둘째, 시계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가 안 정해졌다. 이 글을 연 50~100년의 어긋남에는 그것을 기각한다고 적은 논평이 붙어 있다 (DOI: 10.1080/00310328.2020.1738145, 논평). 보정 곡선이 평평한 구간에 걸려 있다는 제약은 양쪽 모두에게 해당한다. 앞의 고기후 종합 연구가 마지막에 요구한 것도 같은 것이다 — 고고 유적 가까이에서 얻은 고해상도 기록이 더 필요하다 (DOI: 10.1080/01916122.2022.2067259). 앞의 논평도 고기후 자료가 동지중해 전역에 너무 성기게 흩어져 있고, 시작 시점과 지속 기간에 대한 결론들이 서로 어긋난다고 적었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셋째, 후보 원인의 목록이 닫히지 않는다. 앞에 나온 종설이 든 것만 해도 이주, 외부 세력의 약탈, 지배 정치체 내부의 정치 투쟁이나 그들 사이의 체제 붕괴, 중심과 주변의 불평등, 기후 변화와 자연재해, 그리고 질병과 역병이 있고, 저자들은 이 안팎의 모든 변화를 아우르는 설명이 지금까지 없었다고 적는다 (DOI: 10.3764/aja.120.1.0099, 종설). 이 목록에 최근 붙은 것이 병원체다. 크레타의 한 동굴 유적에서 페스트균과 장티푸스균의 고대 유전체가 나왔는데, 다만 그 시점은 이 글이 다루는 시기보다 앞선 기원전 3천년기 후반이다. 저자들은 이것이 초기 복합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때 감염병을 추가 요인으로 다시 들여올 필요를 부각한다고 적는다 (PMID 35882233, 시기가 다름).
파괴층 자체도 자동으로 이 사건에 속하지 않는다. 시리아 카트나의 토기를 다룬 연구는 이 도시의 파괴를 기원전 1340년 무렵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 1세에 의한 것으로 적는다 (DOI: 10.1080/00758914.2018.1514164). 이름이 알려진 왕이 기원전 1200년보다 150년쯤 앞서 파괴한 도시가 있다는 뜻이다.
넷째, 「붕괴」라는 범주 자체가 논쟁 중이다. 앞의 논평이 쓴 문장이 이 자리를 정면으로 겨눈다. 넓은 지역에 걸쳐 대략 동시대로 보이는 파괴와 정착 양상과 물질문화의 변화라는 다양한 증거 앞에서, 우리는 근대에 들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붕괴 연구를 정리한 다른 논평도 이 분야가 활발한 연구 영역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정의와 용어의 문제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고 적는다 (DOI: 10.1080/00938157.2017.1343025, 논평).
이 방향에는 널리 읽힌 개설서 두 권이 있다 — 『Questioning Collapse』(DOI: 10.1017/cbo9780511757815)와 『Understanding Collapse』(DOI: 10.1017/9781316584941). 다만 이 글은 두 권을 발견의 근거로 쓰지 않는다. 초록 자리에 실린 것이 각각 목차와 출판사 소개문이어서 무엇을 어떻게 재서 그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런 책이 있고 그 제목이 저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만 적는다.
무엇이, 어디서, 언제
이 글이 따라온 물음은 네 개였다. 하나씩 답한다.
무엇이 끝났나. 왕궁 체제다. 미케네에서 왕궁들은 파괴되고 다시 세워지지 않았고 (DOI: 10.1017/ccol9780521814447.018), 히타이트 제국은 끝났다. 도시와 마을도 실제로 불탔다 — 종설 하나는 필로스에서 가자에 이르는 해안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그 뒤 자주 비워진 채로 남았다고 적는다 (DOI: 10.1002/wcc.345, 종설). 그러나 왕궁 바깥은 그 문장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차드르 회위크의 주민들은 살림을 바꿔 가며 그 자리에 계속 살았고 (DOI: 10.1080/00934690.2018.1558906), 엘레우시스의 취락은 줄어들었지만 사람이 계속 살았으며 (DOI: 10.3764/aja.118.3.0401), 종설 하나가 적은 대로 농촌 정착지들은 농목축을 바꿔 가며 이어졌다 (DOI: 10.1002/wcc.345). 장거리 교역은 줄었지만 (DOI: 10.1002/wcc.345) 그 공백에서 에돔의 구리 산업이 커졌고 (DOI: 10.1073/pnas.0804950105), 문자는 아나톨리아와 북시리아에서 계속 새겨졌다 (DOI: 10.1093/oso/9780190687632.003.0046). 펠로폰네소스에서는 정착지의 수와 크기가 줄었는데, 그 감소의 연대가 알려진 기후 사건과 정확히 맞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DOI: 10.1016/j.quascirev.2015.10.042). 그리고 딸린 물음 하나 — 조사된 한 무덤에서는 사람이 갈리지 않았다 (PMID 27627996, 단일 유적·무덤 하나·어금니 43개).
어디서 끝났나. 왕궁이 있던 곳에서다. 기원전 1200년 이전의 그리스는 상당 부분이 애초에 왕궁 지역이 아니었고 그 지역들은 붕괴 없이 이어졌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북시리아에서는 도시 하나와 그 배후지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기원전 1180년 무렵부터 자리를 잡았다 (DOI: 10.1093/oso/9780190687632.003.0046). 이집트는 아예 그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다 — 앞의 논평은 이집트를 겨눈 공격이 실패로 끝났다고 적는다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언제 끝났나. 한 해가 아니다. 종설 하나는 변화들이 기원전 13세기 중후반부터 12세기 내내 서로 다른 시점에 일어났다고 적고 (DOI: 10.3764/aja.120.1.0099), 남부 레반트의 네 유적을 따로 잰 연구는 그 어긋남을 50~100년으로 매겼다 (DOI: 10.1017/rdc.2018.58). 다만 이 값 자체를 기각한 논평이 있다는 것도 이 답의 일부다 (DOI: 10.1080/00310328.2020.1738145). 확정된 것은 정확한 폭이 아니라, 한 해로 묶는 방식이 자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 끝났나. 미확정이다. 가뭄이 있었다는 것은 나이테와 석순과 꽃가루와 호수 퇴적이 각각 가리킨다. 그러나 그 가뭄은 지역마다 고르지 않았고 (PMID 42497264, 기후 모형 시뮬레이션), 어떤 곳에서는 왕궁 붕괴 이후에 왔으며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1,000년 앞선 다른 건조기에는 하늘이 마르는 동안 밭이 마르지 않았다 (PMID 37291270).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 글에 나온 연구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것을 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테는 해마다의 강수를 재고, 꽃가루는 수십 년의 식생을 재고, 파괴층은 한 번의 화재를 재고, 동위원소는 한 사람이 어디서 자랐는지를 잰다. 이 눈금들을 하나의 연표 위에 얹으려면 각각을 실제 연도로 옮겨야 하는데, 바로 그 옮기는 작업이 이 시기에 특히 흐릿하다.
그러니 「청동기 문명이 무너졌다」는 문장에서 고칠 것은 형용사가 아니라 주어와 시제다. 무엇이 끝났는지를 적고, 어디서 끝났는지를 적고, 언제 끝났는지를 폭째로 적으면, 남는 문장은 훨씬 덜 극적이지만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참이 된다.
근거 논문
단행본과 서평 지면은 발견의 근거로 쓰지 않고 사실 언급으로만 썼으며, 본문에서 그때마다 표시했다. 종설·모형·학위논문·논평도 마찬가지로 인라인에 등급을 적었다.
- "Absolute Time Ranges in the Plateau of the Late Bronze to Iron Age Transition and the Appearance of Bichrome Pottery in Canaan, Southern Levant" (2018) — DOI: 10.1017/rdc.2018.58 — 남부 레반트 네 유적의 전환이 절대 연대로 50~100년 어긋나고, 단색→이색 토기 변화는 100년 넘게 걸렸으며 남쪽이 먼저였다. 전환은 동시적이지 않다.
- "1177 B.C.: The Year Civilization Collapsed" (2014, 단행본) — DOI: 10.1515/9781400849987 — 이 연도를 대중화한 책. 초록 자리가 출판사 소개문이라 사실 언급으로만 인용.
- "Revisiting 1177 BCE and the Late Bronze Age Collapse" (2022) —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1 — 같은 저자의 학술지 포럼 기고. 단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없고 「완벽한 폭풍」이었다는 견해를 유지한다고 적는다.
- "Revisiting 1177 BCE and the Late Bronze Age Collapse" (2022, 포럼 논평) — DOI: 10.5325/jeasmedarcherstu.10.2.0186 — 메디넷 하부 명문의 사실 오류(아르자와·카르케미시·하투사), 필로스 석순의 반대 결과, 비왕궁 그리스의 존속, 「붕괴」라는 범주 자체가 근대의 구성물이라는 논지.
- "Continuity or conquest? A multi-isotope approach to investigating identity in the Early Iron Age of the Southern Levant" (2017) — PMID 27627996 — 텔 도탄 초기 철기 무덤의 어금니 43개. 외지인 부재로 인구 교체 설명이 불충분하고, 동시에 이동성도 낮아 탈중심화 그림의 일반화도 제한된다.
- "Crisis in Context: The End of the Late Bronze Age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2015, 종설) — DOI: 10.3764/aja.120.1.0099 — 설명이 「셀 수 없이 많고」 변화들은 기원전 13세기 중후반~12세기의 서로 다른 시점에 일어났으며 최종 해답은 없다.
- "Environmental Roots of the Late Bronze Age Crisis" (2013) — PMID 23967146 — 키프로스 고기후 자료와 방사성탄소 연대. 저자들은 기후로 촉발된 기근과 「바다 민족」 침입 사이의 「인과 연결」을 자료가 드러낸다고 적고, 기근·해상 침입·광역 전쟁·정치경제적 붕괴의 관계를 통계로 분석했다고 적는다. 이 편에서 인과를 가장 강하게 쓰는 논문.
- "Severe multi-year drought coincident with Hittite collapse around 1198–1196 bc" (2023) — DOI: 10.1038/s41586-022-05693-y — 아나톨리아 중부 향나무 나이테·안정동위원소. 기원전 1198~1196년(±3) 연속 극심 가뭄이 임계점을 가리킬 수 있다고 적고, 완만한 기후 변화에는 적응 사례가 여럿 있었다고 함께 적는다.
- "Societal responses to cold-season rainfall variability: a speleothem perspective on Byzantine and Hittite climate interactions in Late Holocene Türkiye and southeast Europe" (2025) — — 이스탄불 근처 우준타를라 동굴 석순 하나. 가장 두드러진 건조 이상이 기원전 1210~1170년으로 히타이트 붕괴와 시기가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