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어디서 오는가 — 은행은 예금을 빌려주는가, 만들어내는가
200억 달러가 1조 달러가 되었는데
금융위기 전, 미국 은행들이 연방준비제도에 맡겨 둔 돈은 다 합쳐 200억 달러 남짓이었다. 몇 년 뒤 그 값은 1조 달러를 훌쩍 넘겼다. 쉰 배가 넘는다.
이 돈에는 이름이 있다. 지급준비금은 은행이 중앙은행에 계좌를 열어 맡겨 두는 돈이다. A은행 통장에서 B은행 통장으로 100만 원을 보낼 때 두 은행 사이에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이 돈이다. 은행끼리만 쓰는 현금이라 평생 만져 볼 일이 없다.
교과서대로면 은행들이 그 돈을 밑천 삼아 대출을 몇 배로 늘리고 시중에 도는 돈이 그만큼 불어났어야 한다. 그 배수에도 이름이 있다. 통화승수는 중앙은행이 내놓은 돈 한 단위가 시중의 돈 몇 단위로 불어나는지를 나타내는 배수다.
연준 자신의 워킹페이퍼 하나가 그 자리를 검사했다. 총량 자료와 은행별 자료를 넣은 시계열 모형으로 준비금·통화·은행대출의 관계를 따진 결과는 이렇다 — 그 메커니즘은 표준 통화승수 모형으로도, 은행대출 경로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준비금 잔액이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해도, 표준적인 승수 이야기가 그 효과를 설명할 것 같지는 않다 (DOI: 10.17016/feds.2010.41, 연준 워킹페이퍼).
검사할 문장은 이것이다.
"은행은 사람들이 맡긴 예금을 모아 그중 일부를 빌려준다."
읽기 전에 두 가지. 이건 사기 폭로가 아니라 학파 논쟁이고, 인용 문헌의 등급도 고르지 않다. 심사를 거친 논문과 워킹페이퍼와 심사 전 공개본이 섞여 있고 첫 인용부터가 연준의 워킹페이퍼였다. 어디까지가 합의된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싸우는 자리인지를 가르는 것이 이 글의 일이며, 하중이 큰 대목마다 등급을 적어 둔다.
칠판의 산수 — 그리고 그 산수가 맞았던 자리
경제학 수업을 들었다면 칠판에서 이 계산을 봤을 것이다. 100만 원, 90만 원, 81만 원, 72만 9천 원……
이 계산이 앞에서 말한 통화승수다. 예금의 10%만 지급준비금으로 남기면 된다고 해 보자. 100만 원이 들어오면 90만 원을 빌려주고, 그 90만 원이 다시 예금되어 81만 원을 낳는다. 끝까지 더하면 1,000만 원이 되고, 승수는 10이다.
이 산수에는 전제가 숨어 있다. 예금이 먼저 있어야 대출이 나간다는 것이다. 그 전제를 세운 그림에도 이름이 있다. 대부자금 모형은 은행을 저축을 받아 그 저축을 빌려주는 중개자로 보는 그림이다. 마을 창고에 곡식을 맡기는 사람과 빌려 가는 사람 사이에 창고지기가 선다. 창고에 없는 곡식은 빌려줄 수 없다 — 이 그림의 전부가 그 한 문장이다.
흔한 오해부터 치우자. 이 그림이 언제나 틀렸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 은행들의 대차대조표와 2005~2017년 대출 결정 요인을 분석한 논문은 다중예금창조 — 칠판의 그 사슬 — 가 저발전 금융시스템의 특징이라고 적는다. 그런 시스템에선 대출의 양이 실제로 준비금 공급에 묶여 있었다. 그림이 거짓이었다는 쪽이 아니라 제약이 옮겨 갔다는 쪽이고, 오늘의 주된 제약은 준비금 공급이 아니라 신용 수요라는 것이다 (DOI: 10.32609/0042-8736-2018-11-50-69). 이의가 몰린 곳이 특히 중앙은행들과 국제결제은행의 간행물이었다는 사실도 같은 논문이 적어 두었다.
승수를 버리자는 쪽을 겨냥한 공개본도 있다. 반박은 이렇다 — 승수는 쓸모없지 않다, 금융시스템이 중개를 얼마나 해내고 있느냐를 재기 때문이다. 그 기준으로 재면 미국의 금융 중개는 1985년에 정점을 찍었다 — 통화량을 넓게 잡은 지표로 쟀을 때다 (DOI: 10.31235/osf.io/zusqa, 프리프린트). 여기서 "지표로 읽으면 살아남고 사슬로 읽으면 무너진다"고 정리하고 싶어지는데, 그건 이 글의 정리지 저자의 것이 아니다. 저자는 승수가 무너진다고 어디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심사 지면에서도 비슷한 정교화가 나왔다. 승수가 주저앉은 것을 흔히 "은행이 새 준비금을 그냥 안고 있다"고 해석해 왔는데, 전통적 승수 모형에 2008년 이후 크게 높아진 준비금 수요와 자본 제약을 넣자 미국에서 관찰된 낮은 승수와 예금 증가가 둘 다 설명됐다. 모형이 시사하는 바로는, 준비금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은 맞지만 은행이 새로 만들어진 준비금을 전부 수동적으로 흡수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DOI: 10.1111/jmcb.12975).
"은행은 대부자금의 중개자가 아니다"
2015년 워킹페이퍼 하나는 제목부터가 주장이다. 「은행은 대부자금의 중개자가 아니다」.
저자들은 두 모형을 나란히 놓는다. 대부자금 모형의 은행은 저축자로부터 이미 존재하는 실물 자원을 받아 빌려주고, 맞세우는 쪽의 은행은 대출을 하면서 새 돈으로 된 예금을 만들어 낸다. 바로 다음 문장에 제약이 붙는다. 그렇게 하면서 은행은 주로 수익성과 지급능력에 제약된다 (DOI: 10.2139/ssrn.2612050, 워킹페이퍼). 저자들이 뽑아낸 결론은 뒤에 나올 논쟁에 곧장 걸린다. 다른 조건이 똑같은 중개 모형에 똑같은 충격을 줬을 때, 화폐창조 모형은 대출의 변화가 훨씬 크고, 훨씬 빠르며, 실물 경제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이 뒷문장이 앞문장만큼 중요하다. "은행이 허공에서 돈을 찍어낸다"는 흔한 요약은 저자들이 같은 초록에 적어 둔 제약을 지운 것이다. 만들 수 있다는 것과, 만들어도 규제가 허락한다는 것과, 만들면 이득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장이다.
오해 목록도 정리돼 있다. 한 논문은 은행은 초과준비금이 없으면 "더 빌려줄 수 없는 상태"다, 화폐 창조는 새 예금이 들어오는 데서 시작된다, 작은 은행은 돈을 만들 수 없다 셋을 통념으로 나열하고, 마지막 것을 반박하는 데 지면을 쓴다 (DOI: 10.2139/ssrn.2120439, 워킹페이퍼).
이 견해에도 이름이 있다. 내생화폐는 시중에 도는 돈의 양이 바깥에서 정해져 들어오는 값이 아니라 경제 안에서 대출이 일어나는 만큼 정해진다고 보는 견해다. 중앙은행이 수도꼭지를 잠갔다 열었다 하는 그림 대신, 물이 필요한 곳마다 파이프가 새로 놓이는 그림이다.
검정들 — 그리고 그 검정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
러시아, 2005년부터 2019년까지의 월별 자료. 심사 지면 논문 하나는 화폐 창조를 설명하는 세 이론 — 신용화폐론, 부분지급준비론, 금융중개론 — 을 이 자료에 맞춰 보았고 신용화폐론이 가장 잘 지지됐다. 저자들이 "견고한 증거"라 부른 대목은 순서가 아니라 제약이다 — 오늘날 러시아의 은행 대출을 주로 묶고 있는 것은 신용 수요이며, 이는 미국에서 확인된 바와 같다 (DOI: 10.1093/cje/beae036).
폴란드,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어느 쪽이 먼저 움직이는지 따진 논문의 보고는 이렇다. 은행 대출이 예금과 광의통화를 앞서 움직이고 본원통화까지 앞선다. 저자는 이것을 "대출이 예금을 만든다, 그 반대가 아니라"로 요약한다. 하나 더 붙는다 — 광의통화 승수는 광의통화를 앞서 움직이지 않는다 (DOI: 10.4337/roke.2019.03.09).
더 넓게 본 것도 있다. 20개국 패널 자료로 저축(정기예금·저축성 계좌)과 은행 신용의 관계를 본 워킹페이퍼는 신용 증가가 앞선 저축 변화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다만 저자의 한정어가 붙는다 — 적어도 단기에는 그렇다. 저자는 이것이 대부자금 이론의 직관이 거시 동학을 설명하는 데 잘 작동하지 않음을 가리킨다고 적는다. 신용 호황기에 저축성 예금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도 찾아냈고, 여기서 부분지급준비의 중요한 단점이 시장이자율을 자연이자율에서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라고 추론한다 (DOI: 10.33119/kaewps2017024, 워킹페이퍼). 마지막 추론은 저자의 것이고, 오스트리아학파 경기변동 이론의 틀 안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은 따로 적어 둔다.
셋의 방향은 같다. 범위도 봐야 한다. 둘이 신흥·전환 경제의 단일 국가 검정이고, 가장 넓은 자료를 쓴 한 편이 워킹페이퍼다.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검정이 여럿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모든 나라 모든 시기의 법칙이라는 것은 다른 문장이다.
어디까지가 합의이고 어디부터가 논쟁인가
2022년 «Journal of Economics»의 논문 한 편이 이 논쟁을 이상한 자리로 데려간다.
저자들이 세운 기준점은 이렇다. 불확실성이 없을 때 두 과정은 같은 배분을 낸다는 것이다. 그럴 땐 훨씬 단순한 대부자금 접근을 지름길로 써도 일반성을 잃지 않는다고 적고, 총위험이 있고 계약과 시장이 완비된 경우에도 제한적인 동치 결과가 성립한다고 덧붙인다 (DOI: 10.1007/s00712-021-00747-7).
이 결과는 "대부자금이 맞다"도 "내생화폐가 틀렸다"도 아니다. 그리고 "불확실성이 갈림길"이라는 말도 아니다 — 두 번째 경우가 그것을 보여 준다. 총위험이 있어도 동치가 제한적으로 살아남는다면, 이 논문은 차이가 어디서 벌어지는지를 말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 정리가 세운 것은 승부가 아니라 단순한 쪽을 지름길로 써도 되는 구간이다.
둘의 거리가 체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연구도 있다. 대표적인 은행 하나를 모형화한 논문의 문장은 이렇다 — 화폐공급 과정은 은행이 유동성 압박을 두려워할수록 외생성의 논리 쪽으로 기운다. 지금 은행들이 그 두려움을 갖지 않는 이유는 중앙은행들이 준비금이 넘쳐나는 상태에서 바닥금리 체제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DOI: 10.4337/roke.2021.01.03).
반대편 목소리도 있다. 금융규제 지면의 한 논문은 위기 이후 규제 개혁이 은행의 성격을 오해했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 은행이 상대적으로 고삐 풀린 화폐 창조를 한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하다. 부분지급준비 은행업이 돈의 흐름을 만드는 것은 맞지만 그 흐름은 은행의 자금조달 요건에 묶여 있다. 같은 돈이 여러 번 쓰이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위험이 아니라 짧게 빌려 길게 빌려주는 일의 성질일 뿐이다. 저자는 더 나아간다 — 개정된 규제 틀에는 화폐창조 비판자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장치가 여럿 있고, 그들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으며, 완성되면 그들이 제기한 우려 상당수를 해소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는 내준다 — 새 규제 틀의 경기대응 장치가 충분한지는 더 따져 볼 일이다 (DOI: 10.1108/jfrc-06-2016-0046).
부분지급준비의 결함을 논한 논문은 더 날이 서 있다. 상업은행이 빌려주는 돈을 중개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는 근래 유행한 생각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고 적으며, 근거로 영란은행의 2014년 해설 글을 든다 (DOI: 10.14738/assrj.77.8572). 등급이 높은 지면이 아니고 뒤에서 보듯 특정 개혁안을 주창하는 글이다.
그러면 무엇이 은행을 멈추게 하는가
연준이 생기기 전, 뉴욕의 은행들은 매일 서로에게 진 빚을 맞춰 정산했다.
이 장면을 사료로 재구성한 논문이 있다. 화폐 창조가 개별 시장 거래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다는 전통적 견해를 검사할 대상으로 고른 것이 뉴욕 어음교환소의 일일 청산 실무다 — 중앙은행이 없었으니 가장 시장적으로 보이는 환경이다. 1차 사료가 보여 준 건 반대였다. 매일의 청산은 회원 은행들에게 심각한 난제였고, 그 난제를 다루려면 국가(공권력) 차원의 거버넌스와 은행들 사이의 비시장적 협약이 둘 다 필요했다 (DOI: 10.2139/ssrn.4090961, 워킹페이퍼·법학).
은행이 돈을 만들 수 있느냐보다 만든 돈을 어떻게 정산하느냐가 먼저라는 이야기다. 이 구분을 가장 깔끔하게 적은 것은 상업은행·중앙은행·은행 간 시장·실물 부문을 한 모형에 넣은 연구다. 은행은 대출을 예금 창조로 집행하기 때문에 자금조달 위험 — 새 대출에 댈 돈이 없는 상황 — 은 결코 지지 않고, 재조달 위험, 즉 빠져나간 예금의 순액을 준비금으로 정산하지 못하는 위험만 진다 (DOI: 10.2139/ssrn.5034464, 워킹페이퍼).
같은 논문은 중앙은행이 사들인 자산을 영구적으로 줄이면 준비금 부족한 은행 부문의 돈 만드는 비용이 올라 금융·실물 변수에 유의한 부정적 효과가 난다고 보고하고, 준비금의 양뿐 아니라 분포가 — 총량이 넉넉한 체제에서조차 —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적는다.
정산이 막히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의 예금 인출은 대형 예금자의 전자이체라 잔액을 은행 사이에서 옮길 뿐 희소한 준비금이 고갈되는 것에 해당하는 일이 없다. 은행 간 대출이 효율적인 한 공황성 인출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조정 실패로 인출 사태가 일어나고 물가 하락과 전염이 따른다. 그래서 예금보험이나 지급정지 같은 처방은 이 위기에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고, 중앙은행이 마지막으로 빌려주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DOI: 10.2139/ssrn.676053, 워킹페이퍼).
오늘의 은행을 묶는 것이 하나 더 있다 — 자기자본과 규제다. 한 모형 연구는 국제 은행 규제인 바젤 III의 네 규제 아래에서 일곱 가지 상황을 식별한 뒤, 각각의 상황마다 자기자본의 변화를 신용공급의 변화로 옮기는 배수가 존재하며 통화공급에도 그에 상응하는 승수 효과가 있다고 적는다 (DOI: 10.2139/ssrn.4093065, 워킹페이퍼).
여기서 한 가지 정리가 나오는데 이건 저자의 문장이 아니라 이 글의 것이다. 저자는 두 승수를 비교하지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나란히 놓으면 보인다 — 칠판의 승수는 지급준비금을, 이 모형의 배수는 자기자본을 밑천으로 삼는다. 승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겼다고 읽어도 될 자리다.
그렇다고 지급준비율이 죽은 도구도 아니다. 레바논이 외화 예금 지급준비율을 자국 통화 예금보다 훨씬 크게 올린 사건을 심사 지면 논문이 자연실험으로 썼다. 모든 은행이 포트폴리오를 급히 조정하며 대출을 줄였다. 달러 조달 의존도가 높고 달러 유동자산 완충이 얕은 은행이 더 크게 맞았고, 외국계 은행에 비해 노출된 국내계 은행이 더 느리게 적응했으며, 기업 쪽에서는 기술적 매칭 증거로는 소기업이 불균등하게 맞았다 (DOI: 10.1111/jmcb.12113). 단일 국가의 한 정책 사건이라는 점은 그대로 남지만, "지급준비금은 이제 아무것도 묶지 않는다"는 요약은 이 한 편만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 중앙은행은 무엇을 움직이는가
2008년 10월, 연준은 은행이 맡겨 둔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주기 시작했다.
여기서 용어 하나.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금융자산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그 대금으로 지급준비금을 새로 만들어 은행 계좌에 넣어 주는 정책이다. 이 글을 연 그 숫자가 양적완화를 포함한 비전통적 정책수단의 자취다. 거꾸로 자산을 줄여 거두어들이는 쪽은 양적긴축이다.
준비금에 이자가 붙은 그 시점을 경계로 미국의 1967년 1월부터 2018년 10월까지를 두 구간으로 자른 워킹페이퍼가 있다. 이자 지급 이전 구간에서 표준편차 한 단위의 본원통화 충격은 산출을 정점에서 약 0.31% 올렸고 물가수준을 약 0.29% 영구적으로 올렸으며, 산출 반응이 0보다 유의하게 큰 상태가 약 55개월 이어졌다. 이후 구간에서는 같은 충격에 대한 두 반응이 약하고 통계적으로 부정확했다. 본원통화 변동 가운데 통화정책 충격이 설명하는 몫은 충격 시점 기준 86%에서 44%로 떨어졌고 그 차이는 화폐수요 충격이 흡수했다. 저자의 마무리는 단정이 아니다 — 이 결과들은 본원통화 확대가 실물로 전달되는 총량 경로가 약해졌다는 것과 부합한다 (DOI: 10.2139/ssrn.6809784, 워킹페이퍼·미국 단일국).
그렇다면 새 준비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심사 지면의 다른 연구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준비금 분포에 강하게 영향을 준 규제 변화를 도구로 삼은 인과 추정에서 준비금 창출은 총대출 증가로 이어졌고, 위험추구도 함께 늘었다 (DOI: 10.1111/jmcb.12781).
두 결과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다른 것을 잰다 — 앞은 총량 경로를, 뒤는 은행 단위의 행동을. 둘을 잇는 연구가 있다. 코로나 시기 미국 자료를 쓴 워킹페이퍼는 은행별 주택저당증권 보유량과 지역별 1인당 재난지원금의 차이를 변동 원천으로 삼아 초과준비금이 언제 대출이 되는지를 물었다. 양적완화는 전반적으로 준비금을 늘렸지만, 그것이 신용 확장으로 이어지는 정도는 그 지역이 받은 수요 충격의 크기에 달려 있었다. 다만 이 논문이 내놓은 건 수동적 여건이 아니라 증폭 경로다. 양적완화에 더 많이 노출된 주에서 충격 뒤의 신용 확장과 주택가격 상승이 더 컸고, 저자들의 결론은 양적완화가 코로나기 재정부양 프로그램의 효과를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DOI: 10.2139/ssrn.4318709, 워킹페이퍼).
준비금은 방아쇠라기보다 증폭기다 — 늘려 놓는다고 대출이 저절로 나가진 않지만 빌리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반응을 키운다. 수량 자체가 무력한 것도 아니다 — 앞의 그 모형 연구는 경기대응적인 수량 준칙의 후생 기여가 정책금리 준칙에 맞먹는 크기에 이를 수 있다고 적는다 (DOI: 10.2139/ssrn.5034464, 워킹페이퍼).
아직 안 풀린 것 — 은행 바깥의 돈
2008년 9월, 연준은 위기의 충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왜 못 막았는지 분석한 논문의 답은 무능이 아니라 배선이다. 당시 은행과 연준 사이의 안전 구조가 그림자금융까지 뻗어 있지 않았고, 그사이 그림자금융은 이미 세계 금융시스템의 등뼈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DOI: 10.2139/ssrn.3432365, 워킹페이퍼).
그림자금융은 은행이 아니면서 은행과 비슷한 일 — 짧은 돈을 받아 긴 자산에 넣고 그 과정에서 돈에 가까운 청구권을 만들어 내는 일 — 을 하는 기구들을 가리킨다. 대형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채권을 담보로 하루이틀짜리 돈을 주고받는 시장이 대표적이다. 그 청구권은 통장에 찍히지 않지만 들고 있는 쪽에서는 현금이나 다름없다.
같은 논문은 위기 이후 연준이 그림자금융 참가자들에게도 유동성과 담보를 열어 주는 새 구조를 만들었다고 적는다. 중앙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 아닌 곳에 자기 준비금을 연 일이었다.
그러면 "통화량"이라 부르는 숫자는 무엇을 세는가. 전 세계 단기 자금을 회계 틀로 그린 연구의 주장은 이렇다. 통화집계량 — 돈을 세는 M0·M1·M2 같은 공식 지표들 — 은 자산운용사들이 실제로 돈처럼 쓰는 수단, 특히 채권을 담보로 한 초단기 거래를 아예 포함하지 않는다. 그 집계량도 미국의 금융계정도 오늘날 금융 생태계의 제도적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저자들은 담보·위험·유로달러의 흐름을 따로 잡는 부속 계정을 제안한다 (DOI: 10.2139/ssrn.2476415, 워킹페이퍼).
이 그림을 다시 흔들 후보도 있다. 중앙은행이 시민에게 직접 내주는 디지털 형태의 돈이고, 실제 사례에서 나온 첫 증거가 인도의 디지털 루피다.
취급 자격을 단계적으로 준 방식과 홍보 캠페인을 변동 원천으로 쓴 워킹페이퍼의 보고다. 자격 부여는 소매 예금을 2.7% 줄였고, 그 감소는 수시로 찾을 수 있는 저축계좌에 몰려 있었으며 정기예금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용은 잠깐 줄었다가 회복했다. 예상과 어긋난 대목도 있다 — 이 돈이 밀어낸 것은 현금이 아니라 예금에 기반한 디지털 결제였다. 저자들의 후생 계산은 단기에는 손실, 장기에는 이득이다 (DOI: 10.2139/ssrn.7301398, 워킹페이퍼).
국제통화기금의 워킹페이퍼는 이 결과가 나라마다 어디서 갈릴지 모형으로 짚는다. 이 돈이 예금을 빼 가기 쉬운 곳은 저소득 가구가 많고 은행 계좌 접근이 비싼 나라, 즉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단서가 붙는다 — 예금 이탈이 실제로 일어나 은행 중개가 줄어들더라도, 은행이 도매 자금이나 중앙은행 자금 같은 다른 조달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대출에 미치는 영향은 양적으로 작다 (DOI: 10.5089/9798400259029.001, 워킹페이퍼).
처방들 — 저자들의 주장이지 우리 결론이 아니다
1930년대에 헨리 시몬스와 로클린 커리, 어빙 피셔가 내놓은 제안이 있다.
전액지급준비는 은행이 받은 요구불예금 전액을 준비금으로 쌓아 두게 해서 돈을 만드는 일과 빌려주는 일을 아예 떼어 놓자는 제안이다. 통장의 100만 원은 그대로 잠겨 있고, 은행이 빌려주는 돈은 따로 모은 자금에서만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2007~2008년 위기 이후 이 제안에 관심이 되살아났고 혼동도 함께 돌아왔다. "100% 화폐"는 은행 중개를 폐지하자는 것으로, 통화위원회 제도를 세우자는 것으로, 또 더 최근의 내로 뱅킹 제안과 같은 것으로 번갈아 혼동돼 왔다는 것이 한 논문의 정리다 (DOI: 10.3917/redp.325.0835).
실제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저량과 유량이 어긋나지 않게 짜인 모형의 심사 지면 연구가 있다. 전액지급준비에서 정부 지출로 돈을 만들었을 때와 지금 체제에서 같은 지출을 했을 때를 비교한 결과는 김빠질 만큼 밋밋하다 — 산출과 고용과 인플레이션이 거의 동일하게 움직인다. 달라지는 것은 통합 정부부채로, 전액지급준비에서 돈을 만들면 그것이 영구적으로 줄어든다. 통화정책도 중앙은행 준비금의 증가가 요구불예금의 거의 같은 크기의 증가로 옮겨지며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같은 모형이 양적완화에는 다른 판정을 내린다 — 양적완화를 통한 화폐 창조는 통화집계량과 이자율에만 영향을 주고 실물 경제에는 주지 않는다 (DOI: 10.1093/cje/bey034).
반대쪽도 적혀 있다. 모든 화폐창조 실험에서 은행은 대출 수요를 전부 충족할 수 있었지만, 전액지급준비 아래에서는 일시적인 신용경색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일어나느냐는 민간의 행동 변화와 경제 정책, 은행들이 잡는 안전 마진에 달렸다는 것이 저자의 서술이다.
주창하는 쪽 논거도 있다. 앞서 본 그 논문의 저자는 두 가지를 든다. 납세자가 뒷받침하는 예금보험과 구제금융은 은행이라는 한 종류의 대부자에게만 주는 특혜여서 개인 간 대출이나 상거래 신용 같은 다른 대부자들에 비하면 자원 배분의 왜곡이고, 은행에 돈을 맡겨 굴리는 것도 상거래이니 그 손실로부터 참가자를 막아 주는 것은 납세자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처방은 국가 지원을 걷어내되 돈이 완전히 안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국가에 예치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DOI: 10.14738/assrj.77.8572). 이것은 저자의 주장이다.
정반대 방향의 처방도 있다. 한 워킹페이퍼는 제목부터 묻는다 — 「왜 은행이 돈을 만드는가」. 중개자 체제에서는 가계가 예금을 대면서 은행이 대출을 제대로 감시하도록 레버리지를 제한하려 드는데, 은행마다 감시 비용이 다르고 그 차이가 밖에서 안 보이면 은행에 의존하는 기업에 대한 총대출이 비효율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은행이 가계 자금에 기대지 않고 예금을 만들 수 있으면 그 문제가 완화된다. 적절한 레버리지 규제가 함께 있으면 상환 가능성이 높은 은행 쪽의 이득이 감시가 덜한 은행 쪽의 손실보다 크고, 위험에 민감한 자본요건을 붙이면 그 손실을 줄이거나 없앨 수도 있다고 적는다 (DOI: 10.2139/ssrn.4095335, 워킹페이퍼).
질문을 바꾸면 답의 모양이 바뀐다
인용한 문헌들이 크게 다투지 않는 자리가 셋이다. 개별 은행이 대출을 실행하면 그 은행 장부에 예금이 생기고, 작은 은행도 예외가 아니다 (DOI: 10.2139/ssrn.2120439, 워킹페이퍼) — 다만 앞서 본 논문은 이 생각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고 적는다 (DOI: 10.14738/assrj.77.8572). 넘쳐나는 준비금 아래에서 지급준비금 공급은 대출을 묶는 주된 제약이 아니다 (DOI: 10.17016/feds.2010.41; DOI: 10.32609/0042-8736-2018-11-50-69).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정산 능력과 자기자본·규제, 그리고 빌리려는 사람의 수요 — 받치는 것은 모형 연구 둘과 러시아 단일국 실증 하나다 (DOI: 10.2139/ssrn.5034464, 워킹페이퍼·모형; DOI: 10.2139/ssrn.4093065, 워킹페이퍼·모형; DOI: 10.1093/cje/beae036, 러시아).
싸우는 자리도 셋이다. 통화승수가 폐기할 틀인가, 체제에 따라 눈금이 달라지는 틀인가 (DOI: 10.31235/osf.io/zusqa, 프리프린트; DOI: 10.1111/jmcb.12975). 두 그림이 정말 다른 답을 내는가 — 동치 정리 (DOI: 10.1007/s00712-021-00747-7)와 체제 의존 분석 (DOI: 10.4337/roke.2021.01.03)에, 같은 충격에 훨씬 크고 훨씬 빠른 대출 변화와 훨씬 큰 실물 효과를 예측한다는 쪽 (DOI: 10.2139/ssrn.2612050, 워킹페이퍼)이 정면으로 맞선다. 새로 만들어진 준비금이 은행 행동을 얼마나 바꾸는가 — 총량 경로는 약해졌는데 (DOI: 10.2139/ssrn.6809784, 워킹페이퍼) 은행 단위로는 대출과 위험추구가 함께 늘었다 (DOI: 10.1111/jmcb.12781).
"돈은 어디서 오는가"는 장소를 묻는 것처럼 생겼지만, 답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 무엇이 돈을 멈추게 하는가.
칠판의 산수는 그 답을 지급준비금이라고 적었다. 여기 모은 자료는 다른 이름들을 놓는다. 정산할 수단이 있는가, 자기자본이 남아 있는가, 규제가 무엇을 허용하는가, 빌리려는 사람이 있는가. "은행이 무에서 돈을 찍어낸다"는 요약이 틀린 이유는 「무에서」라는 말이 아니라 뒤의 네 가지가 통째로 빠졌기 때문이다. 그 넷 중 어느 것도 고정돼 있지 않다 — 돈에 가까운 것을 만드는 은행 밖 기구들은 이미 통화집계량 밖이고 (DOI: 10.2139/ssrn.2476415, 워킹페이퍼), 중앙은행이 시민에게 직접 내주는 돈은 예금이라는 재료를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 (DOI: 10.2139/ssrn.7301398, 워킹페이퍼).
「인플레이션의 진짜 원인」 편은 돈의 양이 물가를 밀어 올리는지를 물었다. 그 양이 어디서 정해지느냐에 대한 이 편의 답은 정하는 곳이 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융 위기는 왜 반복되나」 편의 붕괴도 「비트코인은 가치가 있는가」 편의 대안도 같은 질문의 변주다.
연준이 생기기 전 뉴욕의 은행들이 매일 아침 마주쳤던 문제는 "우리가 만든 약속을 무엇으로 정산할 것인가"였다. 그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산할 곳과 수단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근거 논문
심사 학술지 논문과 중앙은행·국제기구 워킹페이퍼, 심사 전 공개본이 섞여 있다. 등급은 본문에서 그때마다 표시했다.
- "Money, Reserves, and the Transmission of Monetary Policy: Does the Money Multiplier Exist?" (2010, 연준 워킹페이퍼) — DOI: 10.17016/feds.2010.41 — 준비금 잔액 200억 달러대에서 1조 달러 초과로. 총량·은행별 시계열 분석 결과 표준 승수 모형으로도 은행대출 경로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 "Money multiplier in the context of modern views on money creation: theory and facts" (2018) — DOI: 10.32609/0042-8736-2018-11-50-69 — 다중예금창조는 저발전 금융시스템의 특징. 그 시대엔 준비금 공급이, 지금은 신용 수요가 제약. 러시아 2005~2017.
- "The Money Multiplier and Other Measures of Financial Sector Performance" (2022, 프리프린트) — DOI: 10.31235/osf.io/zusqa — 승수는 쓸모없지 않다 — 그것은 금융시스템의 중개 정도를 잰다. 미국 중개 정점은 1985년(통화량을 넓게 잡은 지표 기준).
- "A Model of QE, Reserve Demand, and the Money Multiplier" (2022) — DOI: 10.1111/jmcb.12975 — 높아진 준비금 수요와 자본 제약을 넣으면 낮은 승수와 예금 증가가 설명된다. 다만 은행이 새 준비금을 전부 수동 흡수하는 수준은 아니다.
- "Banks are Not Intermediaries of Loanable Funds – And Why This Matters" (2015, 워킹페이퍼) — DOI: 10.2139/ssrn.2612050 — 은행은 대출로 새 예금을 만들며, 그렇게 하면서 주로 수익성과 지급능력에 제약된다. 같은 충격에 화폐창조 모형은 훨씬 크고 훨씬 빠른 대출 변화와 훨씬 큰 실물 효과를 예측한다.
- "Money Creation: Misconceptions: A Small Bank Cannot Create Money" (2012, 워킹페이퍼) — DOI: 10.2139/ssrn.2120439 — 초과준비금이 없으면 더 못 빌려준다, 화폐 창조는 새 예금에서 시작된다, 작은 은행은 돈을 못 만든다 — 세 가지 오해와 마지막 것에 대한 반박.
- "The money multiplier and competing theories of money creation: empirical validation for Russia" (2025) — DOI: 10.1093/cje/beae036 — 러시아 2005~2019 월별 자료. 신용화폐론이 가장 지지되며 은행 대출은 주로 신용 수요에 묶여 있다(미국과 같이).
- "The Post-Keynesian endogenous-money supply: evidence from Poland" (2019) — DOI: 10.4337/roke.2019.03.09 — 폴란드 2001~2016. 대출이 예금·광의통화·본원통화를 앞서고, 광의통화 승수는 광의통화를 앞서지 않는다.
- "The role of fractional-reserve banking in amplifying credit booms: evidence from panel data" (2017, 워킹페이퍼) — DOI: 10.33119/kaewps2017024 — 20개국 패널. 신용 증가는 적어도 단기에는 사전 저축 변화와 무관. 신용 호황기엔 저축성 예금 비중이 감소. 자연이자율 관련 추론은 저자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