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peris 아티클
서로마 제국은 자연 때문에 무너졌나 — 얼음 속 납과 뼈 속 세균이 말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그린란드 얼음의 납, 나무와 바다 밑 진흙의 옛 날씨, 무덤 속 뼈의 페스트균은 로마 이야기에 새 증거를 보탰습니다. 역병과 납 급감 같은 사건 증거는 2~3세기와 6세기에 몰려 있고, 서로마가 끝난 5세기를 직접 말하는 것은 기후 변동이 그 쇠퇴와 겹쳤다는 관측입니다. 그 관측이 보여 주는 것은 시기의 겹침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자연 때문에 무너졌나 — 얼음 속 납과 뼈 속 세균이 말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476년, 서쪽 절반이 끝났을 때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빙 둘러싼 땅을 하나로 묶었던 고대 국가로, 4세기 말인 395년부터 동서 두 절반으로 나뉘어 다스려졌습니다. 서쪽 절반은 5세기 내내 국경을 넘어 들어온 여러 무리와 안쪽의 내전에 시달리며 땅을 잃었고, 410년에는 게르만계 무리인 서고트족이 로마 시를 약탈했습니다. 476년, 게르만계 장군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물러나게 했고, 교과서는 이 해를 서로마 제국이 끝난 해로 적습니다.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의 일입니다. 동쪽 절반,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의 이스탄불)를 수도로 삼은 동로마 제국은 그 뒤로도 천 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6세기 중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옛 땅 일부를 되찾기까지 했습니다.
서쪽은 왜 무너졌을까요. 역사가들은 오래도록 정치·군사·경제의 사정으로 이 질문에 답해 왔습니다. 대중에게는 한 문장짜리 답이 더 널리 돌았습니다. 지도층이 타락했다, 국경 밖 무리가 밀고 들어왔다, 수도관과 그릇의 납이 로마 사람들을 서서히 중독시켰다.
지난 수십 년 사이 이 질문에 자연과학의 증거가 들어왔습니다. 그린란드 얼음에 갇힌 납, 나무와 바다 밑 진흙에 남은 옛 날씨, 무덤 속 뼈에서 건진 세균의 유전자입니다. 미국 역사학자 카일 하퍼는 책 「로마의 운명(The Fate of Rome)」에서 기후와 역병을 로마 이야기의 주요 배역으로 올렸고, 다른 연구자들은 세 편에 걸친 반론을 냈습니다 (DOI: 10.1111/hic3.12507).
이 글은 세 가지 증거가 「로마 몰락」 이야기에 무엇을 더했고 무엇은 더하지 못했는지를 가릅니다. 등장하는 역병은 셋이고, 일어난 때가 서로 멉니다. 안토니누스 역병은 2세기 후반인 165년 무렵, 키프리아누스 역병은 3세기 중반에 제국을 덮쳤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541년 동로마에서 시작된 일로, 476년 서로마의 끝보다 65년 뒤입니다.
얼음에 남은 납 — 광산이 바빴던 해의 기록
그린란드 얼음에서 지금부터 2,500년 전부터 1,700년 전까지, 곧 기원전 50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에 해당하는 층을 재면 납이 자연 상태의 네 배쯤 들어 있습니다. 그 여덟 세기 동안 그린란드 얼음판에 내려앉은 납을 모두 더하면, 1930년대 이후 납을 넣은 휘발유가 내려앉힌 양의 15%에 이릅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납·은 채굴과 제련이 2,000년 전에 이미 북반구 하늘을 반구 규모로 더럽혔다는 뜻입니다 (PMID 17797222).
빙하 코어는 그린란드처럼 눈이 녹지 않고 해마다 쌓여 얼음이 되는 곳에 긴 관을 박아 뽑아 올린 얼음 기둥으로, 층마다 그해 공기에 떠 있던 먼지와 화학물질이 갇혀 있습니다. 납이 그 먼 북쪽까지 간 길은 이렇습니다. 고대에 은은 주로 납과 은이 함께 든 광석을 녹여 얻었고, 그때 공기로 날아간 납이 바람을 타고 북극 얼음에 내려앉았습니다 (PMID 29760088). 얼음 속 납이 많은 해는 광산과 제련로가 바삐 돈 해입니다.
2018년에는 기원전 1100년부터 서기 800년까지를 한 해보다 잘게 나눠 재고, 공기가 납을 실어 나른 길까지 모형으로 계산해 유럽의 납 배출량을 해마다 추정했습니다. 배출량은 페니키아인이 지중해로 세력을 넓힐 때 오르기 시작해, 카르타고와 로마가 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광산을 넓힐 때 빨라지고, 로마 제국 아래에서 가장 높았습니다. 공화정 시절에는 전쟁과 정치 혼란에 맞춰 출렁였고, 2세기와 3세기의 큰 역병 두 번과 같은 무렵에 뚝 떨어진 뒤 500년 넘게 낮게 머물렀습니다. 은화에 든 은의 양도 같은 흐름으로 줄었습니다. 저자들은 이 기록이 제국의 첫 두 세기 동안 경제가 꾸준히 자랐고, 그 성장을 2세기의 안토니누스 역병이 끝냈음을 보여 준다고 결론짓습니다 (PMID 29760088).
납을 경제의 맥박으로 읽는 해석은 그 뒤에도 논쟁거리였습니다. 2026년에는 제국이 비교적 안정됐던 「로마의 평화」 시기(기원전 27년~서기 180년)를 해마다 맞춰 보는 통계 분석이 나왔습니다. 해마다 출렁인 납 배출량의 약 4분의 1을 여름 기온, 은화 발행량, 전쟁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 따뜻한 해에는 납으로 읽은 경제 활동이 활발한 쪽이었고, 은화를 많이 찍거나 전쟁을 치른 해에는 납 배출이 오히려 낮았습니다. 저자들은 이를 「납 기록에 고대 유럽의 경제 활동 정보가 담겨 있다」는, 논란이 컸던 주장을 통계로 뒷받침한 결과로 봅니다 (DOI: 10.1016/j.eeh.2026.101765). 나머지 4분의 3의 출렁임은 이 세 가지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봉우리는 여러 기록에서 되풀이됩니다. 유럽과 그린란드의 얼음·호수 바닥·습지 기둥 89개를 모아 보면 81개에 로마 시대의 뚜렷한 납 봉우리가 있고, 그중 44개는 반구 규모의 오염, 22개는 근처 광산 같은 지역 오염으로 해석됐습니다 (DOI: 10.1080/14614103.2023.2181295). 얼음 속 납은 광산과 제련로가 얼마나 바삐 돌았는지를 적은 기록이고, 그 기록을 경제의 기록으로 읽는 일은 통계적 지지를 쌓아 가는 중입니다.
공기의 납과 몸속의 납
로마 사람들은 납을 물길의 관과 그릇, 화장품과 약, 물감에 썼습니다. 단맛을 내는 포도즙 졸임은 일부러 납 그릇에 끓였습니다. 로마 작가들도 납의 독을 언급했지만, 오래 쌓인 납 중독의 전형적인 증상이 기록으로 처음 묘사된 것은 7세기입니다. 뼈 속 납은 로마 시대에 뚜렷이 늘었지만, 가장 높을 때도 오늘날 유럽 사람의 41~47% 수준이었습니다. 이 개관 논문의 저자들은 그래서 만성 납 중독이 서로마 몰락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DOI: 10.4314/actat.v26i2.52570).
납이 몸에 들어오는 길은 유약 바른 그릇, 물감, 화장품, 일부러 먹는 것까지 여럿이었지만, 엘리트가 아닌 시골의 대다수에게 가장 큰 길은 광산과 제련로가 내뿜은 공기 오염이었을 수 있습니다. 2025년의 한 연구는 이 길을 숫자로 옮겨 봤습니다. 북극 얼음의 납 기록에 공기 흐름 모형을 얹고, 다시 현대 역학 연구가 찾은 「공기 중 납 → 혈중 납 → 인지 저하」 관계를 적용한 모형 추정입니다. 로마의 평화 절정기에 유럽 공기의 납은 평균 1.0 ng/m³ 넘게 늘었고, 제련소 가까이에서는 150 ng/m³를 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혈중 납은 신석기 시대 바탕값으로 추정한 1.0 µg/dl보다 약 2.4 µg/dl 높아졌고, 그 결과 제국 전역에서 지능지수가 2.5~3점 낮아졌다고 추정됩니다 (DOI: 10.1073/pnas.2419630121). 이 추정이 말하는 것은 아이들의 인지 저하이고, 초록은 그것을 제국의 몰락과 잇지 않습니다.
뼈를 직접 잰 자료도 있습니다. 제국 서쪽 끝인 이베리아반도 북서부의 한 유적에서 700년에 걸친 뼈를 재 보니, 로마 시대의 시골 사람은 같은 자리에 산 로마 이후 사람보다 수은과 납을 두 배 더 지니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뼈 속 납의 평균 57%(가장 높을 때 85%)가 공기 오염에서 왔고, 로마가 기운 뒤에는 그 몫이 24%로 줄었습니다. 그 변화는 근처 습지에 쌓인 납 기록과 나란했습니다 (PMID 31926414). 공기 속 납이 시골 사람의 몸에까지 들어갔다는 것은 이렇게 한 마을의 뼈에서 확인됩니다.
얼음 속 납 기록은 제련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적은 경제 활동의 기록이고, 그 자체로는 누가 얼마나 중독됐는지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몸속의 납은 따로 재야 했습니다. 공기 속 납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은 모형의 추정이고, 그 납이 실제로 몸에 들어갔다는 것은 한 유적의 뼈에서 확인됐습니다. 수도관과 그릇, 포도즙 졸임으로 들어온 납은 얼음 기록에 담기지 않는 다른 길입니다.

나무와 바다 밑 진흙이 기억하는 날씨
이탈리아 남부 앞바다 밑 진흙에는 기원전 200년 무렵부터 서기 600년 무렵까지의 기온과 강수가 3년 남짓 간격으로 적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나온 첫 고해상도 기후 기록입니다 (DOI: 10.1126/sciadv.adk1033). 고기후 프록시는 옛날 날씨를 직접 잰 기록이 없을 때, 날씨에 따라 달라진 자연물의 흔적을 대신 재서 그때가 가물었는지 축축했는지를 읽어 내는 자료입니다. 나무의 나이테, 동굴 석순, 호수와 바다 바닥에 쌓인 층이 모두 여기 듭니다.
로마 기후 최적기는 로마 제국이 커지던 무렵 지중해 둘레의 기후가 비교적 안정되고 농사에 좋았다고 보는 시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기원전 100년부터 서기 800년까지 서유라시아의 글 기록과 여러 자연 기록을 한데 모은 첫 종합에서도, 로마 제국은 안정되고 좋은 기후 속에 일어섰고, 그 조건은 3세기의 위기 때 나빠졌으며, 4세기에 제국이 회복할 때 다시 짧게 좋아졌습니다 (DOI: 10.1162/jinh_a_00379).
이탈리아 남부의 진흙 기록은 로마 기후 최적기에서 6세기까지 이어지며, 서기 100년 무렵부터 불안정과 냉각을 보이고, 130년 무렵 뒤로는 그것이 더 뚜렷합니다. 특히 추운 시기가 셋 있었습니다. 160~180년 무렵, 245~275년 무렵, 그리고 530년 무렵 이후입니다. 셋 모두 대유행병과 같은 무렵입니다. 저자들은 이를 기후 스트레스가 사회적·생물학적 요인과 얽혔다는 시사로 읽습니다 (DOI: 10.1126/sciadv.adk1033). 초록은 병의 이름을 들지 않고 「대유행병」이라고만 적습니다. 연도로 맞춰 보면 첫째는 안토니누스 역병, 둘째는 키프리아누스 역병, 셋째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시기와 겹칩니다.
중부 유럽의 나이테로 지난 2,500년의 여름 강수와 기온을 되짚은 기록에서는, 로마와 중세의 번영기에 여름이 축축하고 따뜻했습니다. 250년부터 600년 무렵까지 기후 변동이 커진 구간은 서로마 제국의 쇠퇴, 그리고 여러 무리가 유럽을 가로질러 옮겨 다닌 이른바 민족 이동기와 겹쳤습니다 (DOI: 10.1126/science.1197175). 앞의 종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마다 달랐던 기후가 그 뒤 몇 세기 동서 두 제국의 다른 운명과 나란히 간다고 적고, 제국 바깥의 기후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큰 이동 두 번을 부추겼다고 봅니다 (DOI: 10.1162/jinh_a_00379).
그리고 6세기에 급격한 추위가 옵니다. 고대 후기 소빙기는 536년 무렵부터 북반구가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1도가량 식으며 시작된 6세기 중반의 한랭기입니다. 이 추위와 사회 혼란의 관계를 여러 사회에 걸쳐 재 보면 관계는 통계적으로 뚜렷하지만 들쭉날쭉합니다. 크게 식고도 거의 바뀌지 않은 사회가 있었고, 조금 식고도 크게 바뀐 사회가 있었습니다. 냉각의 크기와 사회 변화의 크기가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저자들은 이를 사회마다 취약성이 달랐다는 신호로 읽습니다 (DOI: 10.1177/0959683620941079).
기후 기록이 더한 것은 시기의 겹침이고, 그 겹침을 서로마가 무너진 원인으로 바꾸는 일은 여전히 해석입니다.
뼈 속에서 찾은 세균
6세기 무덤에서 나온 사람 뼈에 같은 세균의 DNA가 남아 있었고, 서로 다른 두 실험실이 따로 확인했습니다. 고대 DNA는 수천 년 된 뼈와 이에 조각조각 남아 있는 유전물질을 뽑아내 읽은 것입니다. 페스트균은 페스트라는 병을 일으키는 세균으로, 14세기 흑사병의 원인으로 이미 확인된 바로 그 세균입니다. 두 실험실이 찾은 것이 이 세균의 DNA였습니다. 그때까지 6세기 역병의 원인이 이 세균인지를 두고 열띤 논쟁이 이어졌고, 저자들은 이 결과가 원인을 둘러싼 논쟁을 끝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PMID 23658525).
제1차 페스트 범유행은 541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시작해 750년 무렵까지 두 세기 남짓 되풀이된 페스트 유행 전체를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 뒤로 유전체가 쌓였습니다. 뮌헨 가까운 6세기 무덤의 한 사람에게서는 같은 자리를 평균 17.9번 겹쳐 읽은 정밀한 페스트균 유전체가 나왔고, 그 덕에 먼저 발표된 덜 정밀한 유전체에서 실제로는 없는 변이 19개를 바로잡았습니다 (PMID 27578768). 더 정밀하게 읽은 유전체가 앞선 유전체의 오류를 고친 예입니다.
2019년에는 오스트리아·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의 21개 유적에서 사람 유해를 훑어 페스트균 유전체 8개를 복원했습니다. 그때까지 모호한 문헌으로만 짐작하던 브리튼섬의 역병이 유전자로 처음 확인됐고, 서로 다른 여러 갈래의 균이 유럽에 함께 돌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PMID 31164419). 2025년에는 오늘의 요르단 제라시에서 6세기 중반~7세기 초의 집단 매장지를 조사해, 다섯 사람에게서 서로 거의 똑같은 페스트균 유전체를 얻었습니다. 기록이 처음 역병을 적은 동지중해에서 나온 첫 유전체 증거이고, 그 무렵 한 갈래의 균이 돈 유행으로 보입니다 (PMID 40869973).
안토니누스 역병 쪽은 사정이 다릅니다. 이 역병은 165년 무렵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시작된 대유행병입니다. 하퍼는 2015년, 같은 시대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가 남긴 증상 묘사를 근거로 이 역병을 천연두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썼습니다 (DOI: 10.1017/s1047759415002470). 그런데 최근의 고대 유전체와 진화 연구를 종합하면, 고대에 우리가 천연두로 알아볼 만한 병을 일으킨 바이러스가 있었는지부터 크게 의심받고, 저자들은 고고학자와 역사가가 고대사에서 천연두를 지울 때라고 맺습니다 (DOI: 10.1017/s1047759422000290). 2025년 논문 기준으로, 안토니누스 역병의 병원체는 고대 DNA를 포함한 분자 증거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PMID 39946392). 고대 DNA가 로마 이야기에 확실히 더한 것은 6세기 역병의 정체와 그것이 퍼진 범위이고, 2세기 역병의 정체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정체와 규모는 다른 질문
같은 2015년 글에서 하퍼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대해 그 인구 규모도, 긴 뒷일도 의심받지 않는다고 적을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누스 역병의 심각한 인구 효과도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는 듯하다고 쓰면서, 그 장기적인 정치·사회적 결과는 활발한 논쟁 중이라고 덧붙였습니다 (DOI: 10.1017/s1047759415002470). 그 뒤 두 문장 모두 반론을 만납니다.
2019년의 한 연구진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지중해와 유럽에서 수천만 명을 죽이고 고대를 끝내는 데 한몫했다는 기존 추정을 정면으로 따졌습니다. 글 기록, 법률, 주화, 파피루스 문서, 비문, 꽃가루, 고대 DNA, 무덤 고고학의 여덟 갈래 자료를 하나씩 보고 함께도 봤는데, 어느 것도 역병과의 분명한 연결이나 「큰 재앙」 추정을 받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입니다. 자료를 함께 놓으면 오히려 역병 시기를 가로지르는 연속성이 보이고, 6~8세기의 변화는 이어졌지만 역병이 그 주된 원인이라는 흔한 주장은 증거가 받치지 않는다고 봅니다 (PMID 31792176). 같은 해 다른 글은 지중해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는 해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역병이 높은 사망을 냈을 수 있지만, 넓은 인구 감소를 일으키지도 인구를 낮게 묶어 두지도 않았고, 직접적인 중장기 효과는 있었더라도 작았다는 결론입니다 (DOI: 10.1093/pastj/gtz009). 2020년의 한 글은 이 역병이 실제로 한 일보다 「역병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무서운 신화 때문에 큰 힘을 지니게 됐다고 보고, 그 신화를 떠받치는 세 기둥으로 쥐, 기후, 그리고 고대 유전체를 꼽았습니다 (DOI: 10.1093/ahr/rhaa510).
반대쪽도 분명히 있습니다. 한 반론은 이 「무시할 만한 팬데믹」 주장에 상당한 방법론적 약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역병은 고대 후기에서 중세 초로 넘어가는 과정에 반드시 자리를 얻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자리는 인구보다 문화·종교·사회의 변화 쪽이라고 덧붙입니다 (DOI: 10.25162/mhj-2020-0006). 2021년의 한 관점 글은 유전학이 크게 나아간 바로 그때 일부 역사가들이 역병의 중요성을 낮추려 애쓴다고 보고, 유전학자·환경과학자·고고학자·역사가가 함께 지중해를 넘어 아프로유라시아 전체에서 역병의 영향을 다시 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DOI: 10.1093/pastj/gtab024).
한 도시의 쓰레기 더미도 이 논쟁 곁에 놓입니다. 오늘의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있던 동로마 도시 엘루사에서는 도시 가장자리로 쓰레기를 조직적으로 실어 내던 일이 6세기 중반에 멈췄습니다. 한때 살아 있던 것에 남은 탄소로 나이를 재는 방사성탄소 연대를 탄 씨앗과 숯에 적용하고 토기와 맞춰 정한 그 시점은 고대 후기 소빙기의 시작, 그리고 541년 역병의 발생과 가깝게 겹칩니다. 저자들은 이 기록을 역병의 사망 규모보다는, 제국 변방이 급격한 기후 변화에 버티는 힘이 줄었다는 시사로 읽습니다 (DOI: 10.1073/pnas.1900233116). 한 변방 도시의 기록이라, 제국 전체의 사정으로 넓히기는 어렵습니다.
2~3세기 역병도 같은 질문에 놓여 있습니다. 로마 시 한 곳에서 165~189년의 질병 확산을 여러 병원체로 모형화해 보니, 전체 사망률은 많아야 7% 늘었고, 견준 병원체 가운데 어느 것도 유력한 원인으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 모형 결과는 역병이 제국 인구를 크게 줄였다고 보는 역사가들의 사망률과 어긋납니다. 모형이 낸 마지막 몇 해의 하루 사망자 수도 고대 기록과 맞지 않았는데, 저자들은 그 이유의 후보로 고대 저자들의 과장, 다른 질병, 겨울에 더 심해지는 계절 효과 셋을 듭니다 (PMID 39946392). 키프리아누스 역병을 다시 검토한 글은, 3세기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가 기록해 이름이 붙은 이 역병이 다뉴브강을 건너온 고트족의 침입과 함께 들어왔고, 3세기 중반의 정치·군사 위기를 분명히 키웠지만 아마 위기 자체의 뿌리로 여기지 않는 편이 맞다고 결론짓습니다. 하퍼의 주장과 갈리는 대목입니다 (DOI: 10.1017/s1047759421000349).
고대 DNA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것이 무엇을 바꿨는지는 지금도 양쪽이 맞서는 질문입니다.
연표 위에 세 증거를 겹치면
1~2세기, 제국이 가장 넓고 평화롭던 시절에 얼음 속 납 배출은 정점에 있었습니다 (PMID 29760088). 여름이 따뜻한 해에는 납으로 읽은 경제 활동도 활발한 쪽이었고 (DOI: 10.1016/j.eeh.2026.101765), 이베리아반도 시골 사람의 뼈에는 공기에서 온 납이 쌓였습니다 (PMID 31926414). 이탈리아 남부의 날씨는 100년 무렵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DOI: 10.1126/sciadv.adk1033).
165년 무렵 안토니누스 역병이 옵니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 남부는 추운 시기(160~180년)였고, 얼음 속 납은 뚝 떨어졌습니다. 세 기록이 한 시점에 모입니다. 납 기록의 저자들은 이 역병이 성장을 끝냈다고 보지만, 이 역병의 병원체는 모르고, 로마 시 모형으로는 사망률이 많아야 7% 늘었습니다 (PMID 39946392).
3세기 중반, 키프리아누스 역병과 두 번째 추운 시기(245~275년)가 겹칩니다. 기후 종합은 제국이 「3세기의 위기」를 겪을 때 기후가 나빠졌고, 4세기 제국의 회복은 그보다 짧은 좋은 기후 시기와 겹친다고 적습니다 (DOI: 10.1162/jinh_a_00379).
그리고 5세기, 서쪽 절반이 끝납니다. 이 무렵을 직접 말하는 것은 기후 연구 두 가지입니다. 250년부터 600년까지 기후 변동이 컸던 긴 구간이 서로마의 쇠퇴와 겹친다는 관측 (DOI: 10.1126/science.1197175), 그리고 지역마다 다른 기후가 동서 두 제국의 다른 운명과 나란하다는 종합입니다 (DOI: 10.1162/jinh_a_00379). 둘 다 5세기 서로마의 쇠퇴를 직접 겨냥하지만, 말하는 것은 시기의 겹침과 나란함입니다. 이 무렵 제련 배출로 본 얼음 속 납은 2세기와 3세기 두 번의 급감 뒤로 이어진 낮은 구간에 있었고, 5세기 서쪽의 역병을 확인한 유전체는 이 글이 본 자료에 없습니다.
536년, 고대 후기 소빙기가 시작됩니다. 541년, 동로마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터집니다. 6세기 중반 엘루사의 쓰레기 수거가 멈추고, 그 뒤 두 세기 동안 페스트균은 브리튼섬에서 요르단까지의 뼈에 흔적을 남깁니다. 이때는 서로마가 끝나고 두 세대가 지난 뒤입니다.
역병과 납 급감 같은 사건 증거는 2~3세기와 6세기에 몰려 있고, 서로마가 끝난 5세기를 직접 말하는 것은 기후 변동이 그 쇠퇴와 겹쳤다는 관측입니다. 그 관측이 보여 주는 것은 시기의 겹침입니다.

더해진 것과 남은 것
세 증거가 로마 이야기에 보탠 것은 셋입니다. 얼음 속 납은 제국 경제가 언제 바빴고 언제 식었는지를 해마다 보여 주는 기록이 됐습니다. 고기후 프록시는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가 언제 왔는지를 몇 년 단위로 알려 줬습니다. 고대 DNA는 6세기 역병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것이 브리튼섬까지 퍼졌음을 보였습니다.
더하지 못한 것도 분명합니다. 납 기록은 중독의 정도를 말하지 않고, 기후 기록은 겹침을 원인으로 바꿔 주지 않으며, 유전체는 사망자 수를 세어 주지 않습니다. 추위가 클수록 사회가 크게 흔들린 것도 아니었다는 관측은, 저자들의 말로 취약성의 차이를 가리킵니다 (DOI: 10.1177/0959683620941079). 그 차이를 만든 것이 무엇인지는 기후 기록 밖의 질문입니다. 하퍼의 책에 대한 세 편 반론의 마지막 편도 같은 지점을 겨눴습니다. 비판자들은 그 책에서 환경은 어디에나 있지만 사람과 사회와 문화의 행위는 거의 빠져 있다고 보고, 복잡한 역사 과정에는 더 섬세한 인과 설명이 필요하다고 맺습니다 (DOI: 10.1111/hic3.12507).
이 글에 쓰인 도구는 첫걸음 시리즈에서 따로 풀었습니다. 나이테와 숯으로 연대를 잡는 법은 「탄소로 나이 재기 — 모래시계와 나이테로 읽는 방사성탄소 연대」, 뼈에 쌓인 납과 삶의 흔적을 읽는 법은 「뼈가 말하는 것 — 이와 뼈에 나눠 적힌 한 사람의 일기」, 뼈에서 세균과 사람의 유전자를 건지는 법은 「유전자가 말하는 것 — 대대로 베껴 쓴 낡은 책 한 권」에 있습니다. 갈레노스와 고대 저자들의 역병 묘사를 얼마나 믿을지는 「기록을 읽는 법 — 할머니의 일기와 그날의 신문」이 다룬 질문 그대로입니다.
자연은 이제 로마 이야기의 배역이 됐지만, 서로마가 왜 5세기에 끝났는가는 여전히 정치·군사·경제의 사정을 함께 따지는 해석의 질문입니다.
근거 논문
- "Greenland ice evidence of hemispheric lead pollution two millennia ago by greek and roman civilizations." (1994) — PMID 17797222 — 기원전 500년~서기 300년 그린란드 얼음의 납이 자연값의 약 4배, 누적 낙하량은 유연휘발유 시대의 15%. 그리스·로마 채굴·제련이 반구 규모 오염.
- "Lead pollution recorded in Greenland ice indicates European emissions tracked plagues, wars, and imperial expansion during antiquity." (2018) — PMID 29760088 — 기원전 1100~서기 800년 연간 납 배출 추정. 제국 아래 최고, 2~3세기 역병과 같은 무렵 급감 후 500년 넘게 낮음. 저자 결론: 첫 두 세기의 성장을 안토니누스 역병이 끝냄.
- "Economic dynamics of the Early Roman Empire: Insights from lead pollution, coinage, weather, and war" (2026) — DOI: 10.1016/j.eeh.2026.101765 — 로마의 평화 시기 연간 납 변동의 약 4분의 1을 여름 기온·은화 발행·전쟁이 설명. 납=경제 정보라는 논쟁적 주장을 통계로 뒷받침.
- "Environmental Impact of Roman Mining and Metallurgy and Its Correlation with the Archaeological Evidence: A European Perspective" (2023) — DOI: 10.1080/14614103.2023.2181295 — 기둥 89개 중 81개에 로마 시대 납 봉우리, 44개 반구 규모·22개 지역 오염.
- "Lead poisoning in ancient Rome" (2010) — DOI: 10.4314/actat.v26i2.52570 — 로마 시대 뼈 납은 현대 유럽인의 41~47%가 최고. 저자들은 만성 납 중독이 서로마 몰락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고 봄.
- "Pan-European atmospheric lead pollution, enhanced blood lead levels, and cognitive decline from Roman-era mining and smelting" (2025) — DOI: 10.1073/pnas.2419630121 — 얼음 기록·대기 모형·현대 역학 관계로 추정. 아동 혈중 납 +2.4 µg/dl, 지능지수 2.5~3점 저하.
- "Human bones tell the story of atmospheric mercury and lead exposure at the edge of Roman World." (2020) — PMID 31926414 — 이베리아 북서부 한 유적, 로마 시대 시골 사람 뼈의 수은·납이 로마 이후의 2배. 대기 기원 납 57%(최고 85%) → 24%.
- "Climate change, society, and pandemic disease in Roman Italy between 200 BCE and 600 CE" (2024) — DOI: 10.1126/sciadv.adk1033 — 이탈리아 남부 해저 퇴적물 약 3년 해상도. 160~180·245~275·530년 이후 한랭기가 대유행병과 연관.
- "Climate Change during and after the Roman Empire: Reconstructing the Past from Scientific and Historical Evidence" (2012) — DOI: 10.1162/jinh_a_00379 — 제국은 안정된 좋은 기후 속에 일어섰고 3세기 위기에 나빠짐. 지역 기후 차이가 동서 제국의 다른 운명과 나란함.
- "2500 Years of European Climate Variability and Human Susceptibility" (2011) — DOI: 10.1126/science.1197175 — 중부 유럽 나이테. 로마 번영기에 축축하고 따뜻한 여름, 250~600년 변동 증가가 서로마 쇠퇴·민족 이동기와 겹침.
- "Climate and social change at the start of the Late Antique Little Ice Age" (2020) — DOI: 10.1177/0959683620941079 — 536~560년 무렵 북반구 10년 안에 약 1도 하강. 냉각과 사회 혼란의 연결은 유의하나 사회마다 크게 다름.
- "Yersinia pestis DNA from skeletal remains from the 6(th) century AD reveals insights into Justinianic Plague." (2013) — PMID 23658525 — 두 독립 실험실이 6세기 유해에서 페스트균 DNA 확인. 저자들은 원인 논쟁을 끝내야 한다고 봄.
- "A High-Coverage Yersinia pestis Genome from a Sixth-Century Justinianic Plague Victim." (2016) — PMID 27578768 — 뮌헨 인근 6세기 유해에서 17.9배 유전체. 이전 유전체의 거짓 변이 19개 교정.
- "Ancient Yersinia pestis genomes from across Western Europe reveal early diversification during the First Pandemic (541-750)." (2019) — PMID 31164419 — 5개국 21개 유적, 유전체 8개. 브리튼섬 역병의 첫 유전 증거, 여러 갈래 균주.
- "Genetic Evidence of Yersinia pestis from the First Pandemic." (2025) — PMID 40869973 — 요르단 제라시 집단 매장지 5명, 거의 같은 유전체. 동지중해 첫 유전체 증거.
- "Pandemics and passages to late antiquity: rethinking the plague of c.249–270 described by Cyprian" (2015) — DOI: 10.1017/s1047759415002470 — 안토니누스 역병은 갈레노스 묘사로 천연두가 가장 그럴듯하고 심각한 인구 효과가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2015년 시점의 견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규모·뒷일은 의심받지 않는다고 서술.
- "Smallpox's antiquity in doubt" (2022) — DOI: 10.1017/s1047759422000290 — 고유전체·진화 연구 종합. 고대에 천연두로 알아볼 바이러스가 있었는지 크게 의심.
- "Comparative SIR/SEIR modeling of the Antonine Plague in Rome." (2025) — PMID 39946392 — 병원체 분자 증거 없음. 로마 시 165~189년 모형에서 전체 사망률은 많아야 7% 증가.
- "The Justinianic Plague: An inconsequential pandemic?" (2019) — PMID 31792176 — 여덟 갈래 자료 어느 것도 「큰 재앙」 추정을 받치지 않음. 연속성, 역병이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은 증거가 받치지 않음.
- "Rejecting Catastrophe: The Case of the Justinianic Plague" (2019) — DOI: 10.1093/pastj/gtz009 — 인구 절반 사망 해석은 버려야 함. 국지적 고사망 가능, 넓은 인구 감소는 없었다는 결론.
- "The Justinianic Plague and Global Pandemics: The Making of the Plague Concept" (2020) — DOI: 10.1093/ahr/rhaa510 — 역병의 사학적 힘은 실제 증거보다 신화에서 온다는 주장. 쥐·기후·고유전체를 세 기둥으로 지목.
- "The 'Justinianic Plague': An "Inconsequential Pandemic"? A Reply" (2020) — DOI: 10.25162/mhj-2020-0006 — 최소주의 주장의 방법론적 약점 지적. 역병은 전환기에 자리가 있으며 인구보다 문화·종교·사회 쪽.
- "Viewpoint New Approaches to the 'Plague of Justinian'" (2021) — DOI: 10.1093/pastj/gtab024 — 역병 영향을 낮추려는 시도에 대한 응답. 학제 협력으로 아프로유라시아 전체의 영향을 재야 한다는 관점.
- "Ancient trash mounds unravel urban collapse a century before the end of Byzantine hegemony in the southern Levant" (2019) — DOI: 10.1073/pnas.1900233116 — 엘루사의 조직적 쓰레기 수거가 6세기 중반 종료, 고대 후기 소빙기·541년 역병과 겹침. 변방의 회복력 감소 시사.
- "The "Plague of Cyprian": A revised view of the origin and spread of a 3rd-c. CE pandemic" (2021) — DOI: 10.1017/s1047759421000349 — 다뉴브의 고트족 침입으로 유입. 3세기 위기를 키웠으나 뿌리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
- "Plagues, climate change, and the end of an empire: A response to Kyle Harper's The Fate of Rome (3): Disease, agency, and collapse" (2018) — DOI: 10.1111/hic3.12507 — 하퍼 책에 대한 3부 반론의 마지막. 결정론적 접근, 사람·사회·문화의 행위가 빠졌다는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