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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의 돌은 어디서 왔고 누가 세웠나 — 찾아낸 고향과 아직 남은 해석
큰 돌 대부분은 25km 북쪽, 작은 돌은 웨일스, 가운데 돌은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왔습니다. 돌의 고향은 하나씩 특정됐지만, 어떻게 옮겼고 왜 세웠는지는 아직 해석의 영역입니다.
스톤헨지의 돌은 어디서 왔고 누가 세웠나 — 찾아낸 고향과 아직 남은 해석
솔즈베리 평원의 돌 세 무리
잉글랜드 남부 윌트셔에는 솔즈베리 평원이라는 넓은 백악(분필 성분의 무른 석회암) 언덕이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 무렵, 지금부터 약 5천 년 전, 이곳 사람들이 둥근 도랑을 파면서 스톤헨지 공사가 시작됐고, 기념물은 그 뒤 수백 년에 걸쳐 여러 번 고쳐 지어졌습니다. 이들은 브리튼섬의 신석기 사람들, 곧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아직 금속을 쓰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농경 공동체가 브리튼에 처음 닿은 것은 기원전 4000년 무렵이고 (DOI: 10.1038/s41598-026-66094-z), 이 사회는 글자로 된 기록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DOI: 10.1038/d41586-024-02589-x). 그래서 스톤헨지에 관해 아는 것은 모두 돌과 흙과 뼈에서 나옵니다.
스톤헨지의 돌은 크게 세 무리입니다. 사르센석은 스톤헨지의 바깥 큰 원과 가운데 문 모양 돌짜임을 이루는 큰 돌로, 모래알 사이를 석영이 메워 단단히 굳힌 돌입니다. 문 모양 돌짜임은 두 기둥 위에 가로돌 하나를 얹은 것입니다. 블루스톤은 사르센석보다 작은 돌들로, 솔즈베리 평원 땅에는 없는 화성암과 일부 퇴적암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화성암은 땅속 마그마나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식어 굳은 돌입니다.
가운데에는 다른 재질의 돌이 하나 있습니다. 제단석은 스톤헨지 한가운데 누워 있는 무게 6톤의 사암 덩어리입니다. 이름은 제단이지만 이 돌이 무엇에 쓰였는지, 언제 이 자리에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DOI: 10.6084/m9.figshare.c.8736920).

이 돌들이 어디서 왔는가는 400년 넘게 이어진 논쟁거리였습니다 (DOI: 10.1126/sciadv.abc0133). 질문은 넷으로 나뉩니다. 돌은 어디서 왔나, 누가 세웠나, 어떻게 옮겼나, 왜 세웠나. 지난 100년, 특히 최근 몇 해 사이에 지질학이 첫 질문에 하나씩 답을 냈습니다. 큰 돌 대부분은 북쪽으로 약 25km (DOI: 10.1126/sciadv.abc0133), 작은 돌은 서쪽으로 약 225km 떨어진 웨일스, 가운데 돌은 700km 넘게 떨어진 스코틀랜드 북동부입니다 (DOI: 10.14324/ai.27.1.13). 이 글은 그 답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바깥 원에서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며 따라가고, 이어서 뼈와 유전자가 「누가」에 관해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넷 가운데 무엇이 확인됐고 무엇이 아직 해석인지 끝에서 가릅니다.

큰 돌은 25km 북쪽에서 — 사르센석
스톤헨지에 남아 있는 사르센석은 52개이고, 그중 50개가 화학 성분이 서로 같습니다. 2020년 한 연구진은 이 일치를 근거로 50개가 한 지역에서 왔다고 추론했습니다. 1958년 보존 공사 때 58번 돌에서 뽑아 둔 원통형 시료를 브리튼 남부 곳곳의 사르센석과 견주었고, 스톤헨지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윌트셔의 웨스트 우즈가 대부분의 사르센석이 온 곳으로 가장 그럴듯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DOI: 10.1126/sciadv.abc0133; DOI: 10.1371/journal.pone.0254760). 58번 돌은 이산화규소가 99.7%인 거의 순수한 석영 덩어리이고, 돌 안에서 성분이 고르게 일정합니다 (DOI: 10.1371/journal.pone.0254760). 성분이 일정해야 한 시료가 돌 전체를 대표할 수 있으므로, 이 일정함이 산지 비교의 전제가 됩니다.
이 결론에는 반론이 있습니다. 2024년 다른 연구진은 같은 자료를 다시 분석해, 한 곳에서 왔다는 해석을 의심하고 산지가 세 곳에서 여섯 곳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DOI: 10.1111/arcm.12999). 원래 연구 쪽은 이 재분석이 사르센석처럼 규소가 나중에 스며든 비율이 돌마다 다른 재료에 절대 농도를 쓰고, 쉽게 움직이는 원소로 산지를 가르고, 시료 하나끼리 견줬다는 세 가지 방법 문제를 들어 반박했습니다 (DOI: 10.1111/arcm.13105). 논쟁은 이 지점에서 멈춰 있습니다.
스톤헨지 땅에서 파낸 사르센석 부스러기는 또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부스러기 54개의 미량원소를 58번 돌과 견주자 하나도 58번 돌이나 그와 같은 성분의 돌 49개를 다듬다 떨어진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22개는 세 가지 성분 무리로 묶였고, 이는 웨스트 우즈 말고도 적어도 세 곳에서 사르센석이 들어왔음을 시사합니다. 산지를 짚을 수 있었던 15개 대부분은 북쪽 25~33km의 몽크턴 다운 등 말버러 구릉 일대였고, 셋은 남동쪽 51km, 하나는 남동쪽 123km 지점이었습니다 (DOI: 10.1016/j.jasrep.2024.104406). 저자들은 이렇게 다양한 산지의 사르센석이 왜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짐작만 할 수 있다고 적습니다. 그 조각들이 지금은 사라진 큰 돌 약 30개 가운데 하나에서 나왔는지, 망치돌이었는지, 의식에 쓰려고 가져온 작은 덩어리였는지 같은 여러 가능성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DOI: 10.1016/j.jasrep.2024.104406).
정리하면 남아 있는 큰 돌 대부분의 고향은 25km 북쪽으로 가장 그럴듯하게 좁혀졌지만, 그것이 스톤헨지에 들어온 사르센석 전부의 고향은 아닙니다.
작은 돌은 웨일스에서 — 빙하인가 사람인가
블루스톤의 고향 논의는 100년이 넘었습니다. 1923년 영국 지질학자 허버트 헨리 토머스가 웨일스 서남부 펨브룩셔 북쪽의 프레셀리 구릉(웨일스어로 미니드 프레셀리)을 지목했습니다. 그 뒤 조사들은 토머스가 짚은 구체적인 바위 자리들을 다시 문제 삼았지만, 새로 찾은 자리도 프레셀리 구릉을 포함한 같은 북부 펨브룩셔 일대였습니다 (DOI: 10.1111/gto.12198). 넓은 지역은 100년 동안 그대로이고, 그 안의 정확한 노두(바위가 땅 위로 드러난 자리)가 바뀌어 온 것입니다.
진짜 논쟁은 「누가 옮겼나」였습니다. 1991년 한 연구진은 스톤헨지의 돌 시료 15개와 파낸 조각 22개를 X선 형광으로 분석했습니다. 돌레라이트(어두운 화성암)는 프레셀리 동쪽 좁은 지역의 세 곳에서, 유문암(밝은 화산암) 기둥돌은 네 곳에서 왔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산지가 여럿 섞인 것을 보고, 사람이 바위에서 골라 떼어 낸 돌보다 빙하가 이것저것 섞어 실어 나른 표석 더미에 가깝다고 판단했습니다. 빙하가 실어 나른 바위, 곧 표석 가운데 스톤헨지 돌레라이트와 화학적으로 같은 것이 웨일스 남부에 있고, 카디프와 브리스틀 근처에서도 표석이 나와 빙하가 적어도 에이번강 일대까지 왔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보다 동쪽에서 표석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공백은 18세기에 들판의 바위를 대대적으로 치운 기록으로 설명했습니다. 평원 근처 강자갈에 빙하가 남기는 고운 물질이 없는 것도, 큰 바위가 빙하 위에 얹힌 채 실려 왔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연구진의 결론은 블루스톤을 웨일스에서 솔즈베리 평원까지 옮긴 것은 빙하였고, 건설자들은 평원에 이미 흩어져 있던 표석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DOI: 10.1017/s0079497x00004527).
그 뒤 사람의 손을 가리키는 증거가 북부 펨브룩셔에서 나왔습니다. 유문암 부스러기 일부는 펨브룩셔 해안 가까운 크레이그 로스이펠린의 채석장 자리로 이어졌고, 카른 메닌의 바위 지대에서는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 돌레라이트를 떼어 낸 흔적과 스톤헨지 블루스톤과 모양·크기가 비슷한 기둥 모양 돌덩이를 만든 흔적이 나왔습니다 (DOI: 10.1017/s0003598x00115340). 카른 메닌의 돌 채취는 훨씬 이른 기원전 7천년기에 이미 시작됐고, 저자들은 농경 이전의 수렵채집민이 이 바위를 처음 썼다고 봅니다 (DOI: 10.1017/s0003598x00115340). 2026년에는 솔즈베리 평원 개울 퇴적물 속 광물 알갱이의 나이가 런던 분지 쪽 남부 브리튼 암석과 맞고 빙하가 가져온 흔적은 없다는 분석이 나왔고, 논문은 제목에서 이 결과가 스톤헨지 거석의 빙하 운반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내세웠습니다 (DOI: 10.1038/s43247-025-03105-3). 이 글이 확인한 것은 한 문장짜리 요약이고, 평원에 빙하 흔적이 남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은 1991년 연구가 이미 예상해 둔 대목입니다.
블루스톤의 고향이 프레셀리 구릉을 포함한 북부 펨브룩셔라는 것은 확인된 사실에 가깝고, 누가 옮겼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채석장 흔적은 사람의 손을 가리킵니다. 다만 카른 메닌의 채취는 첫 블루스톤이 선 기원전 3천년기 초보다 늦은 3천년기 후반이고, 그곳의 기둥 모양 돌덩이에 대해 초록이 말하는 것은 스톤헨지 블루스톤과 닮았다는 데까지입니다 (DOI: 10.1017/s0003598x00115340; DOI: 10.1017/s0003598x00098069). 「무엇을 옮겼나」에 관한 해석은 여전히 갈립니다. 영국 고고학자 마이크 파커 피어슨의 연구진은 프레셀리 근처 와운 마운을 해체된 돌 원으로 보고, 그 돌 일부가 스톤헨지 초기의 원형 구덩이 줄(오브리 구멍)에 세워졌다고 해석했습니다. 영국 고고학자 티모시 다빌은 와운 마운이 이 지역에 흔한 작은 돌 배치 여러 개일 수 있고, 웨일스의 「원본 원」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지금 증거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DOI: 10.15184/aqy.2022.82). 파커 피어슨 쪽은 원 한가운데의 화덕 자리와 둘레의 새 흔적을 들어 원래 해석을 다시 주장했습니다 (DOI: 10.15184/aqy.2022.132). 2024년의 한 논문은 와운 마운에 작은 돌 원 하나가 있었다는 것조차 입증되지 않았고, 웨일스 서부에서는 스톤헨지와의 연결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해석의 부풀림」을 낳았다고 비판했습니다 (DOI: 10.1177/09596836241236318).
빙하설을 낸 1991년 연구도 돌의 고향은 웨일스로 봤습니다. 웨일스에서 돌이 왔다는 데까지는 양쪽이 같고, 웨일스에 먼저 서 있던 원을 통째로 옮겨 왔는지도 논쟁 중입니다.
가운데 돌은 스코틀랜드에서 — 제단석의 고향이 바뀌기까지
제단석은 오랫동안 블루스톤의 하나로 분류됐고, 고향도 웨일스로 여겨졌습니다. 1991년 연구도 제단석을 웨일스 서남부의 고생대 암석에서 온 것으로 봤습니다 (DOI: 10.1017/s0079497x00004527). 이 생각은 2020년부터 몇 해에 걸쳐 단계적으로 무너졌습니다.
2020년 연구는 제단석 조각과 웨일스 밀퍼드 헤이븐의 밀 베이 사암을 광물 조성과 지르콘 알갱이로 견주어, 밀 베이가 산지가 아니라고 확인했습니다. 다만 이 연구는 산지를 웨일스와 잉글랜드 경계 쪽 동쪽으로 옮겨 보았습니다 (DOI: 10.1016/j.jas.2020.105188). 2022년에는 휴대용 X선 형광 분석에서 제단석과 그 부스러기에 바륨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 드러났고, 함께 분석한 적은 수의 웨일스 사암 시료와는 이 점이 크게 달랐습니다 (DOI: 10.1180/mgm.2022.22). 2023년 연구는 잉글랜드·웨일스 분지의 사암 58개를 분석해 바륨 1000ppm을 넘는 넷도 광물 조성이 달라 산지에서 제외했습니다. 저자들은 제단석이 이 분지에서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며 북부 브리튼까지 넓혀 찾자고 제안하고, 제단석을 블루스톤 분류에서 빼자고 했습니다. 제단석을 블루스톤으로 여겨 온 것이 웨일스 기원이라는 오랜 생각에 영향을 줬다는 판단이었습니다 (DOI: 10.1016/j.jasrep.2023.104215). 2024년에는 신석기 유적이 풍부한 스코틀랜드 북쪽 오크니 제도의 본섬을 조사했지만, 그곳 사암은 제단석과 맞지 않았습니다 (DOI: 10.1016/j.jasrep.2024.104738).
답은 같은 해 다른 방법에서 나왔습니다. 지르콘 연대는 사암 속 모래알에 섞인 지르콘이라는 단단한 광물 알갱이마다 처음 결정이 된 때를 재는 방법으로, 알갱이들의 나이 분포가 그 모래가 깎여 나온 땅의 지문 노릇을 합니다. 지르콘은 생길 때 우라늄을 품고, 그 우라늄이 일정한 속도로 납으로 바뀌므로 알갱이 하나하나의 나이를 셀 수 있습니다. 2024년 연구진은 제단석 조각 속 지르콘과, 같은 방식으로 나이를 잴 수 있는 인회석·금홍석 알갱이의 나이와 화학 성분을 쟀습니다. 그 나이 구성을 브리튼과 아일랜드 전역의 퇴적암과 견주자 스코틀랜드 북동부 오카디언 분지의 「오래된 붉은 사암(Old Red Sandstone)」과 두드러지게 닮았습니다. 연구진은 제단석이 지금 자리에서 적어도 750km 떨어진 곳에서 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DOI: 10.1038/s41586-024-07652-1). 오카디언 분지는 북쪽의 오크니·셰틀랜드 제도에서 인버네스를 거쳐 동쪽으로 뻗은 넓은 지역이고, 화학 성분이 북쪽 섬들의 암석과 맞지 않아 스코틀랜드 본토 쪽으로 좁혀집니다 (DOI: 10.14324/ai.27.1.13). 2021년 다시 찾은 19세기 제단석 박편에서도 같은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알갱이 나이가 나왔습니다 (DOI: 10.1016/j.jasrep.2026.105619).
제단석의 스코틀랜드 북동부 기원은 웨일스 후보들을 몇 해에 걸쳐 하나씩 지운 뒤 모래알의 나이로 짚어 낸 가장 유력한 답입니다. 그 답에도 아직 빈칸이 있습니다. 넓은 분지 안의 정확한 자리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2026년 연구는 지르콘 나이 구성이 가장 잘 맞는 곳이 스코틀랜드 본토 북동쪽 끝의 케이스네스이고, 빙하가 남쪽으로 옮기기 더 쉬운 분지 남쪽 후보들은 맞는 정도가 약하다고 보고했습니다 (DOI: 10.1002/jqs.70080). 정확한 출처를 좁히는 일이 중요한 까닭을 한 연구진은 이렇게 적습니다. 틀린 산지보다 산지 미상이 낫습니다 (DOI: 10.6084/m9.figshare.c.8736920).
뼈가 말하는 먼 곳의 사람과 동물
돌이 먼 곳에서 왔다면 사람은 어땠을까요. 여기서 쓰는 도구는 이와 뼈 속 화학입니다. 스트론튬 동위원소는 스트론튬 가운데 무게가 다른 것들인데, 그 섞인 비율이 땅마다 조금씩 다르고, 그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자란 사람의 이에 그 비율이 그대로 박힙니다. 묻힌 곳의 땅과 몸에 남은 비율이 다르면 그 사람은 다른 땅에서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3천년기 초, 블루스톤 원 안의 화장 묘지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009년 한 연구진은 20세기 발굴 기록과 새 방사성탄소 연대를 바탕으로 이렇게 제안하고, 이곳이 한 유력 가문의 무덤이었을 수 있으며 그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DOI: 10.1017/s0003598x00098069). 화장은 보통의 방법을 막았습니다. 이의 사기질을 재는 표준 방법을 화장 유골에는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8년 연구진은 화장된 뼈에서 스트론튬을 재는 새 방법으로 스톤헨지의 화장 유골을 분석했습니다. 분석한 화장 유골 25명 가운데 적어도 10명은 이 기념물이 선 웨식스의 백악 땅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저자들은 고고학 증거와 합쳐 볼 때 이들의 가장 그럴듯한 출신지가 블루스톤의 고향인 웨일스 서부라고 제안했습니다 (DOI: 10.1038/s41598-018-28969-8). 이 25명은 이 기념물에 묻힌 「선택된 소수」였고, 건설에 손을 보탠 사람 전체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DOI: 10.1038/s41598-018-28969-8).
사람 뼈가 드문 자리는 짐승이 메웠습니다. 스톤헨지 가까이에는 같은 시기의 큰 정착지 유적 듀링턴 월스가 있습니다. 그곳과 주변 유적에서는 태우지 않은 사람 유골이 드물고 화장 유골로는 할 수 있는 분석이 제한돼, 사람이 기른 짐승이 사람의 출신지를 대신 알려 주는 단서가 됩니다 (DOI: 10.1007/s12520-019-00849-w). 기원전 2800~2400년 무렵 스톤헨지 일대와 웨식스의 후기 신석기 네 유적에서 나온 잔치용 돼지 131마리를 분석하자 출신지가 브리튼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 자리에서 기른 돼지는 적었습니다. 이 분석은 고고학 증거상 대륙과의 접촉이 없었다고 보고 후보를 처음부터 브리튼 안으로 한정했습니다 (DOI: 10.1126/sciadv.aau6078). 듀링턴 월스의 소 49마리는 대부분 브리튼 남부와 서부에서 왔습니다 (DOI: 10.1007/s12520-019-00849-w).
같은 방법이 조금 뒤 시기의 사람들에게도 쓰였습니다. 스톤헨지 근처 보스콤 다운의 한 무덤에서 나온 청동기 초(기원전 2500~2000년 무렵) 유골 일곱 구 가운데 성인 남성 셋, 이른바 「보스콤 궁수들」은 어릴 때와 사춘기 초에 서로 다른 땅에서 살았고 그 뒤 스톤헨지 일대로 왔습니다. 그런 비율을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땅은 웨일스지만, 스코틀랜드나 유럽 일부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근처 노먼턴 다운의 무덤과 스톤헨지 도랑에서 나온 성인 남성 둘은 스톤헨지 일대에서 자랐습니다 (DOI: 10.1111/j.1475-4754.2006.00258.x).
이 사실들을 한자리에 놓아 봅니다. 스톤헨지 초기에 화장돼 묻힌 이들 가운데 분석한 25명 중 적어도 10명은 백악 땅 밖에서 살았습니다. 수백 년 뒤 큰 돌이 서던 무렵, 스톤헨지 근처와 웨식스 네 유적의 잔치 자리에는 브리튼 곳곳에서 기른 돼지가 모였고, 소의 대부분은 남부와 서부에서 왔습니다. 청동기 초의 한 무덤에는 먼 곳에서 자란 남자 셋이 묻혔고, 근처 다른 매장지에는 토박이가 묻혔습니다. 뼈는 스톤헨지 일대가 먼 곳의 사람과 짐승을 끌어들인 자리였음을 보여 주지만, 그 표본은 소수의 화장된 사람과 잔치에 오른 짐승이고, 돌을 끈 사람들의 명단은 아닙니다.
유전자가 말하는 인구의 변화
이제 「누가」의 다른 면, 핏줄을 봅니다. 고대 DNA는 수천 년 된 뼈와 이에 조각조각 남아 있는 유전물질을 뽑아내 읽은 것입니다. 브리튼의 신석기 사람 67명과 그 이전 수렵채집민 6명의 유전체를 견준 2018년 프리프린트는 농사가 대륙에서 건너온 농경민과 함께 들어왔다는 쪽에 압도적인 근거가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DOI: 10.1101/267443, 프리프린트). 이 해석에 대해서는 신석기 물건과 풍습이 먼저 들어오고 사람의 큰 이주는 그보다 늦었다는 두 단계 모형이 대안으로 제시돼 있습니다 (DOI: 10.1017/s0959774321000639).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기원전 3100년 무렵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유럽 신석기 농경민과 유전적으로 비슷했습니다 (DOI: 10.1038/s41598-026-66094-z). 스톤헨지 공사가 시작될 무렵 브리튼에 살던 사람들은 이 신석기 농경민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다음 변화는 토기와 함께 왔습니다. 비커 현상은 종을 엎어 놓은 모양의 비커 토기와 그에 딸린 풍습이 서유럽과 중유럽에 넓게 퍼진 일을 가리킵니다. 비커 토기는 기원전 2750년 무렵부터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람의 이동으로 퍼졌는지 생각의 전파로 퍼졌는지는 오래된 논쟁이었습니다 (DOI: 10.1101/135962, 프리프린트). 유럽인 170명의 고대 DNA를 분석한 2017년 프리프린트는 이베리아와 중유럽 사이에서는 이주가 주된 방식이 아니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브리튼에서는 대륙에서 온 이주가 비커 문화를 퍼뜨렸고, 그 이주가 브리튼 신석기 사람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몫의 90% 넘게를 수백 년 안에 대체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결론은 브리튼에서 새로 보고된 80명 자료에 가장 크게 기댑니다 (DOI: 10.1101/135962, 프리프린트). 2026년 연구는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독일 서부 112명의 유전체로, 브리튼으로 건너온 비커 사람들이 라인강·마스강 하류 일대에서 그곳 토박이와 바깥에서 온 이주민이 섞여 생긴 집단이고, 이들이 브리튼 신석기 조상 몫 90~100% 교체의 주된 원천이었다고 보고했습니다 (DOI: 10.1038/s41586-026-10111-8).
잉글랜드 남서부 12개 유적의 30명을 읽은 2026년 연구는 그 변화의 시점을 좁혔습니다. 기원전 3100년 무렵 이전의 사람은 모두 유럽 신석기 농경민과 유전적으로 비슷했고, 기원전 2550년 무렵 이후의 사람은 브리튼 비커 사람들과 비슷했습니다. 급변은 기원전 3000~2500년 사이에 있었습니다 (DOI: 10.1038/s41598-026-66094-z). 세 유적에서는 청동기 사람들이 천 년도 더 전에 유전적으로 다른 신석기 공동체가 세운 무덤에 묻혔습니다. 저자들은 이를 새로 들어온 집단이 이미 자리 잡은 풍경에 스스로를 잇고 옛 무덤의 권위를 빌리려 한 시도일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DOI: 10.1038/s41598-026-66094-z). 이 해석은 남서부의 무덤 유적들을 놓고 내린 것입니다.
이 변화가 스톤헨지 건설자의 교체였는가에 관해서는, 연대를 나란히 놓는 데까지가 근거의 범위입니다. 가운데 큰 돌 짜임의 연대는 기원전 2600~2400년으로 정리됐고, 이는 브리튼에서 가장 이른 비커 매장보다 앞섭니다. 다만 그때 이미 비커 토기가 들어오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DOI: 10.1017/s0003598x00095624). 공사는 그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2008년 발굴은 블루스톤 이중 원을 세운 때를 잠정적으로 기원전 2300년 무렵으로 보았습니다 (DOI: 10.1017/s000358150900002x). 큰 돌은 비커 사람들이 묻히기 전에 섰고, 블루스톤은 그 뒤에도 다시 놓였습니다. 비커 현상과 함께 수백 년 사이에 남서부를 포함한 브리튼 사람들의 조상 몫이 바뀌었다는 것까지는 유전자가 말하지만, 스톤헨지에 묻힌 사람의 유전체는 이 근거들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스톤헨지 초기 매장의 대부분은 화장이었고, 이 일대에서 태우지 않은 사람 유골은 드뭅니다 (DOI: 10.1017/s0003598x00098069; DOI: 10.1007/s12520-019-00849-w). 스톤헨지 도랑에서 나온 태우지 않은 성인 남성처럼 동위원소 분석을 거친 유골은 있지만 (DOI: 10.1111/j.1475-4754.2006.00258.x), 이 글이 근거로 삼은 유전 연구의 초록에는 그런 유골이 나오지 않습니다.
교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이 초록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유럽 전역의 비커 유전 연구가 알려지자 언론은 「네덜란드 무리가 스톤헨지를 세운 브리튼 사람들을 몰살했나」 같은 제목을 달았지만, 한 해설 기사는 연구의 결론이 제목보다 더 복잡했다고 적었습니다 (DOI: 10.1042/bio04201030). 교체의 정도도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오크니 북서부의 청동기 22명과 철기 3명의 유전체를 읽은 연구에서는 바깥에서 들어온 이주의 흔적이 뚜렷했지만, 남성 계통 대부분은 그곳 신석기 사람들에게서 이어졌습니다 (DOI: 10.1073/pnas.2108001119).
아직 해석인 것 — 어떻게 옮겼고 왜 세웠나
처음의 네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어디서」는 상당 부분 답이 났습니다. 큰 돌 대부분은 25km 북쪽, 블루스톤은 약 225km 서쪽의 북부 펨브룩셔(프레셀리 구릉 일대), 제단석은 700km 넘게 떨어진 스코틀랜드 북동부입니다. 「어떻게 옮겼나」는 여전히 추론입니다. 제단석 연구진은 스코틀랜드에서 육로로 옮기기에는 지형의 장벽이 커서 바다로 옮겼을 것으로 보고, 그 경로가 신석기 사회의 높은 조직력을 보여 준다고 해석했습니다 (DOI: 10.1038/s41586-024-07652-1). 빙하가 길의 일부를 맡았을 가능성도 검토됐습니다. 빙하가 제단석을 북해의 도거뱅크 쪽으로 옮겼다면 사람이 끌어야 할 거리는 700km에서 400km로 줄지만, 도거뱅크는 제단석이 스톤헨지에 왔을 무렵보다 먼저 바다에 잠겼습니다. 저자들은 빙하가 도왔더라도 사람이 상당한 거리를 옮겨야 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DOI: 10.1002/jqs.70080).
「왜 세웠나」는 더 열려 있습니다. 2025년 한 논문은 제단석이 가장 큰 문 모양 돌짜임 앞에 누운 배치가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누운 돌 원」과 닮았고, 오크니의 후기 신석기 집과 듀링턴 월스의 집 바닥 배치가 유난히 비슷하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연결을 섬 전체를 하나로 묶는 기념물로서 스톤헨지를 세운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나을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DOI: 10.14324/ai.27.1.13). 앞에서 본, 웨일스 출신일지 모를 한 가문의 무덤으로 출발했다는 제안도 이 기념물의 성격에 관한 또 하나의 해석입니다 (DOI: 10.1017/s0003598x00098069). 2024년 한 논쟁 논문은 스톤헨지와 와운 마운 말고도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다른 기념물 무리에도 멀리 떨어진 사회 사이의 연결을 같은 질문으로 물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DOI: 10.15184/aqy.2024.3).
돌의 고향이 특정됐다는 것과 스톤헨지의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것은 다른 문장입니다. 지질학은 돌이 어디서 왔는지를 점점 좁은 범위로 말할 수 있게 됐고, 뼈와 유전자는 이 일대에 먼 곳의 사람과 짐승이 모였고, 비커 현상과 함께 브리튼 인구의 조상 몫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돌을 바다로 옮겼는지 땅으로 끌었는지, 섬 전체를 묶으려 했는지 한 가문을 기렸는지는 그 증거들 위에 세운 해석입니다. 다음에 볼 자리는 둘입니다. 하나는 제단석이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정확히 어디에서 떨어져 나왔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되지 않은 건설기 사람의 뼈가 더 나오는가입니다.
이 글에서 쓴 도구들은 「과거를 어떻게 아나」 시리즈에서 하나씩 다뤘습니다. 글자 없는 사회를 읽는 방법은 「기록을 읽는 법 — 할머니의 일기와 그날의 신문」, 이와 뼈의 스트론튬은 「뼈가 말하는 것 — 이와 뼈에 나눠 적힌 한 사람의 일기」, 기원전 2600~2400년 같은 연대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탄소로 나이 재기 — 모래시계와 나이테로 읽는 방사성탄소 연대」, 조상 몫의 교체는 「유전자가 말하는 것 — 대대로 베껴 쓴 낡은 책 한 권」에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
근거 논문
- "Stonehenge's central rock probably came from Scotland" (2024) — DOI: 10.1038/d41586-024-02589-x — 글자 기록 없는 신석기 사회, 제단석 광물 알갱이 지문이 스코틀랜드 오카디언 분지를 가리킴.
- "Searching for the origin of the Stonehenge Altar Stone: new sedimentological, petrographical, mineralogical, geochemical and isotopic constraints" (2026) — DOI: 10.6084/m9.figshare.c.8736920 — 블루스톤 약 225km 운반, 제단석의 용도와 도착 시점은 미상, 「틀린 산지보다 산지 미상이 낫다」.
- "Origins of the sarsen megaliths at Stonehenge" (2020) — DOI: 10.1126/sciadv.abc0133 — 사르센석 52개 중 50개가 같은 성분, 25km 북쪽 웨스트 우즈가 대부분의 가장 그럴듯한 산지. 출처 논쟁 400년.
- "Stonehenge and its Altar Stone: the significance of distant stone sources" (2025) — DOI: 10.14324/ai.27.1.13 — 사르센 24km·블루스톤 225km·제단석 700km 넘게, 스코틀랜드 본토, 섬 전체 통합의 기념물이라는 해석.
- "Petrological and geochemical characterisation of the sarsen stones at Stonehenge" (2021) — DOI: 10.1371/journal.pone.0254760 — 58번 돌은 지하수 실크리트, 이산화규소 99.7%, 성분이 돌 안에서 일정.
- "Stonehenge revisited: A geochemical approach to interpreting the geographical source of sarsen stone #58" (2024) — DOI: 10.1111/arcm.12999 — 단일 산지 해석을 의심, 3~6곳 배제 불가.
- "Comment on: 'Stonehenge revisited…'" (2025) — DOI: 10.1111/arcm.13105 — 절대 농도·이동성 원소·단일 시료 비교라는 세 방법 문제로 반박.
- "Local and exotic sources of sarsen debitage at Stonehenge revealed by geochemical provenancing" (2024) — DOI: 10.1016/j.jasrep.2024.104406 — 부스러기 54개, 적어도 세 곳의 추가 산지, 25~33km·51km·123km, 이유는 짐작만 가능.
- "The bluestones of Stonehenge" (2017) — DOI: 10.1111/gto.12198 — 1923년 토머스의 프레셀리 지목, 구체 자리는 재검토됐으나 같은 일대.
- "The Geological Sources and Transport of the Bluestones of Stonehenge, Wiltshire, UK" (1991) — DOI: 10.1017/s0079497x00004527 — 시료 15+조각 22, 여러 산지가 섞임 → 빙하 운반 결론(강자갈에 흔적이 안 남았을 수 있다고 예상), 제단석은 웨일스 서남부.
- "Beyond Stonehenge: Carn Menyn Quarry and the origin and date of bluestone extraction in the Preseli Hills of south-west Wales" (2014) — DOI: 10.1017/s0003598x00115340 — 크레이그 로스이펠린 채석장(펨브룩셔 해안), 카른 메닌의 기원전 3천년기 후반 돌레라이트 채취와 기둥 모양 돌덩이, 채취 시작은 기원전 7천년기.
- "Detrital zircon–apatite fingerprinting challenges glacial transport of Stonehenge's megaliths" (2026) — DOI: 10.1038/s43247-025-03105-3 — 평원 개울 퇴적물에 빙하 흔적 없음, 제목은 빙하 운반에 「의문 제기(challenges)」. 한 문장 요약 초록.
- "Mythical rings? Waun Mawn and Stonehenge Stage 1" (2022) — DOI: 10.15184/aqy.2022.82 — 와운 마운은 작은 돌 배치 여럿일 수 있음, 웨일스 원본 원 주장은 현 증거로 뒷받침 안 됨.
- "How Waun Mawn stone circle was designed and built, and when the Bluestones arrived at Stonehenge: a response to Darvill" (2022) — DOI: 10.15184/aqy.2022.132 — 원 중심의 화덕 등 새 증거로 원래 해석 재주장.
- "The Stonehenge bluestones did not come from Waun Mawn in West Wales" (2024) — DOI: 10.1177/09596836241236318 — 큰 원 존재조차 미입증, 「해석의 부풀림」.
- "Constraining the provenance of the Stonehenge 'Altar Stone': Evidence from automated mineralogy and U–Pb zircon age dating" (2020) — DOI: 10.1016/j.jas.2020.105188 — 밀 베이는 산지 아님, 웨일스–잉글랜드 경계 쪽 제안.
- "Linking derived debitage to the Stonehenge Altar Stone using portable X-ray fluorescence analysis" (2022) — DOI: 10.1180/mgm.2022.22 — 제단석의 높은 바륨, 웨일스 사암과 대조.
- "The Stonehenge Altar Stone was probably not sourced from the Old Red Sandstone of the Anglo-Welsh Basin" (2023) — DOI: 10.1016/j.jasrep.2023.104215 — 시료 58개 중 고바륨 넷도 제외, 북부로 넓혀 찾자, 블루스톤 분류에서 빼자.
- "Was the Stonehenge Altar Stone from Orkney?" (2024) — DOI: 10.1016/j.jasrep.2024.104738 — 오크니 본섬은 산지 아님.
- "A Scottish provenance for the Altar Stone of Stonehenge" (2024) — DOI: 10.1038/s41586-024-07652-1 — 지르콘·인회석·금홍석 나이가 오카디언 분지와 일치, 적어도 750km, 바다 운반 시사, 높은 사회 조직.
- "Altar to Attic to Analysis: Geochemical Authentication of a Rediscovered Victorian Thin Section of Stonehenge's Altar stone" (2026) — DOI: 10.1016/j.jasrep.2026.105619 — 2021년 재발견 박편도 스코틀랜드 북동부 알갱이 나이.
- "From Highlands to Henge: Refining the Provenance and Transport Pathways of Stonehenge's Altar Stone" (2026) — DOI: 10.1002/jqs.70080 — 케이스네스가 가장 잘 맞음, 빙하로 도거뱅크까지면 700→400km, 그러나 도거뱅크 침수, 사람의 운반은 여전히 필요.
- "Who was buried at Stonehenge?" (2009) — DOI: 10.1017/s0003598x00098069 — 블루스톤 원 안 화장 묘지로 출발, 웨일스 출신일 수 있는 유력 가문의 무덤일 가능성.
- "Strontium isotope analysis on cremated human remains from Stonehenge support links with west Wales" (2018) — DOI: 10.1038/s41598-018-28969-8 — 화장 유골 25명 중 적어도 10명은 웨식스 백악 땅에서 살지 않음, 웨일스 서부가 가장 그럴듯.
- "Strontium and oxygen isotope evidence for the origin and movement of cattle at Late Neolithic Durrington Walls, UK" (2019) — DOI: 10.1007/s12520-019-00849-w — 소 49마리 대부분 남부·서부, 태우지 않은 사람 유골이 드물어 짐승이 대리 지표.
- "Multi-isotope analysis reveals that feasts in the Stonehenge environs and across Wessex drew people and animals from throughout Britain" (2019) — DOI: 10.1126/sciadv.aau6078 — 돼지 131마리, 브리튼 곳곳 출신, 대륙은 후보에서 제외.
- "Bronze Age childhood migration of individuals near Stonehenge, revealed by strontium and oxygen isotope tooth enamel analysis" (2006) — DOI: 10.1111/j.1475-4754.2006.00258.x — 보스콤 궁수 셋의 이동, 웨일스가 가장 가깝지만 스코틀랜드·유럽 배제 불가, 다른 둘은 토박이.
- "Population Replacement in Early Neolithic Britain" (2018) — DOI: 10.1101/267443 — 프리프린트. 대륙 농경민이 농사를 들여왔다는 압도적 근거.
- "Neolithization and Population Replacement in Britain: An Alternative View" (2022) — DOI: 10.1017/s0959774321000639 — 물건·풍습 먼저, 큰 이주는 나중이라는 두 단계 모형.
- "The Beaker Phenomenon and the Genomic Transformation of Northwest Europe" (2017) — DOI: 10.1101/135962 — 프리프린트. 170명, 브리튼 80명, 수백 년 안에 신석기 유전자 풀 90% 넘게 대체.
- "Lasting Lower Rhine–Meuse forager ancestry shaped Bell Beaker expansion" (2026) — DOI: 10.1038/s41586-026-10111-8 — 112명, 라인–마스 비커 집단의 형성, 브리튼 90~100% 교체의 주된 원천.
- "Diachronic reuse of Neolithic burial monuments by Bronze Age newcomers in Southwestern Britain" (2026) — DOI: 10.1038/s41598-026-66094-z — 12개 유적 30명, 기원전 3000~2500년 급변, 옛 무덤 재사용 해석.
- "The age of Stonehenge" (2007) — DOI: 10.1017/s0003598x00095624 — 큰 돌 짜임 기원전 2600~2400년, 브리튼 최초 비커 매장보다 앞섬, 비커 토기는 이미 들어왔을 수 있음.
- "Stonehenge excavations 2008" (2009) — DOI: 10.1017/s000358150900002x — 블루스톤 이중 원 잠정 기원전 2300년 무렵.
- "Haunted by the ghost of the Beaker folk?" (2020) — DOI: 10.1042/bio04201030 — 해설 기사. 언론 제목보다 연구 결론이 복잡했다.
- "Ancient DNA at the edge of the world: Continental immigration and the persistence of Neolithic male lineages in Bronze Age Orkney" (2022) — DOI: 10.1073/pnas.2108001119 — 청동기 오크니에 대륙계 몫 유입, 남성 계통 대부분은 현지 신석기에서 이어짐.
- "Beyond the bluestones: links between distant monuments in Late Neolithic Britain and Ireland" (2024) — DOI: 10.15184/aqy.2024.3 — 논쟁 논문. 다른 기념물 무리에도 같은 연결 질문을 던지자.